삼방리·어래산
삼방리·어래산
  • 괴산타임즈
  • 승인 2020.12.04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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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서 박사 / 전 공무원
주영서 박사.
주영서 박사.

‘삼고초려(三顧草廬)’는 「삼국지」에서 후한 말 유비가 제갈공명이 사는 초가를 세 번 찾아갔던 일화에서 유래한다. 괴산군 불정면에는 조선왕조 창업에 얽힌 조선판 삼고초려의 일화와 아울러 삼방리, 어래산, 국사봉 등 그 일화와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다.

삼방리 관전마을에 있는 ‘갓돈(冠錢)마을의 유래’ 안내판에는 “전설에 의하면 조선의 첫 번째 정승인 배극렴이 관전마을에 은거했다고 하며. 마을 뒷산에 있는 마애불좌상도 배극렴을 세 번 찾아왔다는 태조 이성계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성한 것이라고 하며, 실제로 마을의 산은 임금이 왔다고 하여 어래산(御來山)이며, 마을 이름은 세 번 방문했다고 하여 삼방리(三訪里)이다.”라고 적혀 있다.

안내판 앞 2차로 건너 바라다보이는 길이 어래산 오르는 길이다. 그 길을 따라 200m 남짓 올라가면 삼방리 마애불(충북 유형문화재 제128호)이 있고, 마애불이 바라보고 있는 산이 어래산(392m)이다.

고려가 이미 국운을 다해가던 1370년대 중반, 중앙권력을 장악한 좌우군도총사 이성계 장군은 대내적으로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고, 대외적으로 대의명분을 세우기 위하여 고려의 충신인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배극렴(裵克廉. 1325~1392) 선생을 조정에 출사시키고자 공을 들이고 있었다.

이때 배극렴 선생은 자신을 총애하던 고려 공민왕이 1374년(공민왕 23년) 9월에 최만생, 홍윤 등의 손에 무참하게 시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부인과 함께 잠적하여 행방이 묘연했다.
선생을 찾기 위해 지방관아까지 동원하여 수소문한 끝에 지금의 어래산 기슭에 은거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왔으나 첫 번째, 두 번째는 만나지도 못했고, 세 번째 찾아와서야 만날 수 있었고 비로소 자기 뜻을 전했다고 한다.

세 번씩이나 자신을 찾아온 이성계 장군에게 감복한 선생은 이후 위화도회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최영 등 구세력을 축출하였으며, 1392년 7월에는 마침내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공양왕을 양위형식을 빌어 폐위시킴으로써 조선왕조를 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개국 일등공신으로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고,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에 올라 고려와 조선 두 왕조에서 정승이 되는 보기 드문 경력을 가지게 되었다.

선생이 이곳에 은거한 시기가 1390년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때는 공민왕 사후 16년이 지났고, 고려왕조가 막을 내리는 1392년 7월을 불과 2년 남짓 남겨두고 있던 시점이라 그때는 이미 새왕조창업 세력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신빙성이 낮고, 문과급제 후 진주목사, 회령부윤 등을 거쳐 합포진첨사로 봉직할 즈음에 공민왕 시해 사건이 일어났으므로, 공민왕 사후부터 1376년(우왕 2년) 진주도원수에 제수되기 이전의 어느 시기에 이곳에 은거했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조선왕조 창업에 얽힌 조선판 삼고초려, 삼방리 어디엔가 태조대왕과 배극렴 선생의 아름다운 인연을 기리는 사당이라도 세워져 있었으면 좋으련만…. 전설과 함께 남겨진 마애불만이 세월의 흔적을 안은 채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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