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백식품(주) 34살의 세상 모진 풍파 시작, "나를 지탱한 건 자식들과 친정어머니였다"
한백식품(주) 34살의 세상 모진 풍파 시작, "나를 지탱한 건 자식들과 친정어머니였다"
  • 괴산타임즈
  • 승인 2018.08.21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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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식품 박향희 대표

[괴산타임즈] “엄마는 결코 쉬운 인생을 살지 않을게 너희를 위해 정말 열심히 살 테니까 우리가 다시 만나 한지붕 아래 살 수 있는 그 날이 올 때까지 엄마 없이도 잘 자라야 한다. 반드시 너희를 데리러 올게”

2002년 34살의 한 젊은 여성이 자신의 아이들을 팔 벌려 끌어안은 채 울고 있다. 이럴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슬퍼하며, 이내 젊은 여성은 아이들을 남겨둔 채 고향을 떠난다.

낯선 곳 낯선 땅에서 시작된 생활, 떠나기 전 아이들에게 했던 약속을 되새기며 모든 체면을 버리고 노점 일을 시작한 젊은 여성.

이른 아침 손수레를 끌며 청주 시내를 가로질러 육거리 전통시장까지 오가는 일을 수년간 계속해오던 이 여성은 한백식품 박향희 대표의 젊은 시절의 일이다.

충북지역 수제 김의 으뜸인 한백식품이 탄생하기 전의 일이기도 하다. 박향희 대표는 그 시절 육거리 시장에서 매일같이 400도에 달하는 맥반석에 김을 구우면서 오로지 성공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버텼다. 그 성공 배경에는 아이들과 한 지붕 아래서 다시 살기 위해서다.

고향을 떠나 청주에 오기 전 전업 가정주부였던 박 대표는 남편의 보증 문제로 3억 원이라는 빚이 생기면서 가정형편이 급격하게 어려워졌다.

이로 인해 온 가족이 함께 생활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서 박 대표는 돈을 벌어야 했다. 전업주부가 전부였던 박 대표가 알아본 것은 바로 장사였다. 빚이 너무 많아 월급쟁이로는 안될 것 같던 박 대표는 장사만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박 대표는 “빚을 갚기 위해 취직자리를 알아봤었는데, 전업주부였던 내가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니까 한 달 급여는 80만 원 가량 수준이었다. 그것 가지고는 우리 아이들과 사는 것도, 데리고 올 수도 없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벽에 부닥쳤다. 장사하려면 적어도 자본금이 있어야 하는데, 박 대표 수중에는 그럴만한 목돈이 없었다. 또다시 고민에 빠진 박 대표는 어떻게 하면 자본금 없아 장사를 할 수 있을지 물색했다.

그러다 우연찮게 노인들이 고무통 다라이를 머리에 이고 장사하러 가는 모습을 본 박 대표는 자본금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일은 저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곧장 실행에 옮긴 박 대표, 하지만 이번에는 노점을 할 자리 선점이 또 골치였다. 노점도 장사이기 때문에 제각각 상인들 자리가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된 것이다.

해서 박 대표는 당장에 장사보다 노점을 하기 위한 현장학습을  택했다. 이를 위해 노점상에 취직해 생활밀착 현장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교차로를 몇 날 며칠 보면서 결국 찾게 된 노점상 취직자리는 바로 수제 김 판매였다. 이것이 바로 한백식품이 탄생하게 된 시발점이자, 박 대표 평생의 인연이 된 순간이었다.

박 대표는 “노점에 취직해 다양한 것들을 알게 됐다. 전통시장에서 가장 장사가 잘돼는 것이 생선장사라는 것도 알게 됐다. 그다음이 바로 김 장사였다”며 “만약 그때 인연을 맺은 게 김이 아니라 생선이었다면 지금 나는 아마도 생선가게 대표가 됐을 것”이라고 웃었다.

김이라는 품목이 생각보다 장사가 잘돼는 것을 보게 된 박 대표는 자신도 한 번 김 장사에 도전에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다. 가족과 박 대표를 알고 있는 지인들이 노점에 취직한 그녀를 슬픈 눈으로 쳐다봤기 때문이다. 이 일이 이후 청주로 오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된 것이다.

박 대표의 친구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울음부터 터트렸다. 박 대표 또한 마음이 전혀 편하지 않았다. 

빚 때문에 앞뒤 보이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도 사람이었기에 감정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박 대표는 “바닥인 모습을 내 가족 내 주변 친한 지인들에게 더는 보이지 말자고 생각하고서는 고향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며 “그렇게 아이들과 이별 후 청주에서의 힘겨운 생활이 시작됐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박 대표는 그렇게 2002년 강원도 원주인 고향을 등지고 청주에 내려오게 됐다.

청주에 내려와 박 대표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시장 답사였다. 큰 전통시장을 찾기 위해 몇 곳을 돌아다녔다.

육거리 시장이 가장 큰 것을 알게 된 박 대표는 곧이어 육거리 상인회에 찾아갔다. 노점을 하기 위해서 자리를 배치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원주에서의 생활밀착 현장학습의 도움이 가장 크게 느껴지던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상인회에서는 대기인원이 너무나 많아 힘들다는 답변이었다. 상인회에 따르면 10년 전부터 예약된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는 것.

포기할 수 없었던 박 대표는 매일같이 상인회장을 쫓아다니며 설득했다.

34살의 그녀는 뒤가 없다. 앞만 보고 가야 했기 때문에 잠시라도 주춤하면 그대로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위치에 서 있었다.

34살의 그녀는 특히 당찼다. 이는 어려운 시점에서 유일한 장점으로 부각됐다. 박 대표는 상인회장을 쫓아다니며 “전통시장이 죽어가는 이유는 노인분들만 있어서이다. 나 같이 젊은 사람이 일해야 시장이 활성화되고 살아난다”며 귀엽게 대들기도 했다.

박 대표는 “처음 1년은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겨울에는 동상도 걸렸다. 
더군다나 노점을 처음 열게 된 날은 7월 말이다. 낮 온도가 35도를 웃도는 불볕더위 기간이었다.

여기에 김을 굽는 맥반석 온도는 400도, 전기도 없기 때문에 그야말로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고 당시를 떠올리며 혀를 내둘렀다.

햇빛을 가리기 위한 파라솔도 사용할 수 없었다. 이를 설치하려고 하면 뒷집이 가린다고 해 설치하지 못하게 했다.

박 대표는 그 한여름 내리쬐는 태양 빛에 달랑 모자 하나 의지하며, 힘겨운 노점생활을 이어갔다.

주변에서는 박 대표의 이런 모습을 보고 얼마 못 버티고 떠날 줄 알았다는 것이다. 더구나 가장 힘겨웠던 것은 김을 굽는데 나오는 연기였다.

하필 노점을 하던 곳이 한복문화의 거리여서 더욱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항의가 많았다.

박 대표는 “들 기름을 두른 김 연기가 한복에 스며들면 쭈글쭈글해져서 주변에서 많이들 눈치 줬다. 오죽하면 아침에 눈을 뜨기가 싫을 정도로 사람들이 심하게 항의를 했다”고 떠올렸다.

시간이 지나자 결국, 일은 터졌다. 항의가 지속하자 상인회장이 박 대표를 찾아와 다른 곳에서 장사를 해야 할 것 같다며 자리 이동을 명령했다.

박 대표는 “그때 상인회장이 찾아와 열심히 하는 내 모습을 보고는 정말 기특하다며 칭찬했는데, 연기 때문에 주변 항의가 많아 다른 품목으로 바꾸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며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이 곳에서 장사할 수 없으니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통보했다”고 설명했다.

쫓겨나다시피 한 박 대표가 간 자리는 육거리 시장에서 동떨어진 곳이었다. 그래도 박 대표는 김 장사를 포기하지 않았다. 김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었다. 오래전 어머니가 맥반석에 구워 주신 그 맛을 잊지 못해 재연하고 싶었던 바람 때문이다. 그 맛을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부심을 지키려 했으나, 현실은 이념과 동떨어진 관계였다. 매출이 급격하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박 대표가 자리를 이동하고 나서 번 하루 매출은 1만5000원가량이었다.

주변에서도 이를 안타깝게 여기며 박 대표에게 노점 말고 취직을 제안했으나, 박 대표는 모두 거절 했다.

박 대표는 “당시 앞집 사장이 내게 찾아와 취직하면 100만 원은 벌 수 있을 텐데 왜 젊은 사람이 이러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100만 원 가지고 될 것 같았으면 벌써 그만뒀다. 지금 나는 100만 원 가지고는 절대 안 된다”며 웃으며 회상했다.

당시 그녀는 빚이 수억 원이라 한 달에 족히 500만 원씩 갚아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박 대표는 “빚을 갚지 못해 독촉 자들이 아이들 학교까지 찾아가는 상황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못해도 매달 500만 원씩 갚아 나가야 했다.

더구나 빚을 제외하더라도 아이가 셋이니 월 100만 원씩 들것을 생각해 나는 매달 800만 원을 벌어야 하는 사람이었다”며 “특히 그때 당시 여자 벌이로 800을 벌어야 했으면, 살림도 포기해야 했으니, 파출부도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단순계산으로 월 1000만 원을 벌어야 우리 아이 셋과 내가 함께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또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이 때문에 박 대표는 자신이 1000만 원을 벌어야 하는 사람이라 월 100만 원은 쳐다보지도 말자고 다짐했다.

누구보다 성공에 대한 절박함을 바랐던 박 대표는 그 모든 것은 자신의 아이와 함께 살기 위해서였다. 나이 34살부터 세상의 모진 풍파를 겪은 박 대표는 어느새 강인한 어머니의 상이 돼 있었다. 그렇게 5년 뒤 박 대표는 육거리에 작은 공장을 설립했다. 아무런 연고도, 돈도 없던 이곳에서 스스로 노력해 얻은 결과였다.

박 대표는 “정말 나는 쓰러질 때까지 일만 했다. 일할 수 없으면 잡생각이 들어 그게 더 고통스러웠다. 해서 쓰러질 때까지 오로지 일만 했다”며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나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다. 정신적 고통보다 몸이 겪는 고통이 더 낳았다”고 힘들지만 그 속에서 얻은 안심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딱 7년 정도 걸렸다. 다시 내 아이들과 함께 살 수 있는 날이 오게 된 것은 7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서다”며 “4년째부터는 아이 하나씩을 데려왔다”고 고백했다.

무엇보다 그녀를 더욱 굳건하게 한 건 친정어머니였다. 자신의 빚 때문에 살고 있던 집을 처분하고 지하방으로 옮기면서 오히려 좋다고 웃으며 말하는 어머니에게 너무나 죄송스러웠다.

박 대표는 “내 빚 때문에 살고 있던 단층집을 전세를 주고, 지하방으로 옮겨 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 죄송스러워서 고개를 들 수 없었는데, 그때 어머니가 ‘조그만 집으로 오니까 아주 좋다. 청소할 것도 없고 난방비도 덜 든다.

무엇보다 너를 위해 이렇게 해줄 수 있다는 게 더 행복하다’는 소리에 그만 눈물이 앞을 가렸다”고 회상했다.

극단적인 상황까지 내몰리던 상황에서 만났던 한 여성 목사의 위안도 도움이 컸다.

박 대표는 “그때 목사님이 자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내게 해주셨다. 목사님 자신도 라면 한 봉지를 끓여 먹고 자살을 하려고 했는데, 그때 큰 달력에다가 ‘나는 누구인가’라고 써보고 하나하나 그때 꿈꿨던 것을 이루고 죽자고 이야기했었다.

목사님은 그 모든 것을 전부 이뤘다고 내게 말했다”며 “내게도 큰 달력에다가 ‘나는 누구인가’를 써보고 이루고 싶은 것을 전부 적어보는 게 어떠냐며 용기를 북돋워 주셨다”고 말했다.

이는 비단 박 대표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목사가 말했던 것처럼 박 대표는 “젊은 세대들도 힘든 일이 있어도 현실을 슬퍼하고 원망하기보다 스스로 이겨내 보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며 “내가 했던 것처럼 달력에 ‘나는 누구인가’를 적어보고 하나씩 이루고 싶었던, 꿈꿔온 것을 적어보면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현재 박향희 대표는 한백식품을 운영하며, 자신이 그토록 바랬던 한 지붕 아래 아이 셋과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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