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충북 최초 만세운동은 괴산이다
[기획] 충북 최초 만세운동은 괴산이다
  • 괴산타임즈
  • 승인 2018.05.06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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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안만세운동유적비, 소수만세운동유적비
괴산 만세운동. (인터넷 포털 사이트)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자주독립을 위하여 전 민족이 하나가 되어 일으킨 항일민족 투쟁으로, 국권의 회복과 자유를 얻기 위해 일제에 항거한 비폭력 투쟁이었다.

일제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이로 인해 7,509명이 학살당했으며, 15,961명 부상당했고, 46,948명이 검거 당했다.

충청지방에서는 당시 92회의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 중 51회가 일제와 물리적으로 직접 충돌했다.

충청지방의 만세시위 사건 가운데 55%가 물리적 충돌로 발전했다는 것은 전국 평균치인 37%를 훨씬 넘어서는 것으로 충청지방의 시위가 매우 격렬했음을 보여준다.

실제 충북에서는 경찰관서 13개, 헌병대주둔지 5개, 군청과 면사무소 7개, 우편소 1개 등 26개의 일제 식민통치기구가 습격당해 파괴되었다. 희생자 역시 평안, 경기지역 다음으로 많았다.

괴산에서는 3월 19일 괴산읍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는데, 이는 충청북도 내 만세운동의 시발이기도 했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경술국치로 순국한 홍범식의 아들 홍명희가 만세시위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홍명희는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여했다가 전날의 의병장 한봉수, 손병희를 만나 고향으로 돌아오는 즉시 동지들을 규합하고 경고문과 격문을 배포하여 괴산지역 첫 봉기를 이끌어냈다.

3월 19일 괴산읍에서 600여 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경찰서를 습격하고 감금돼 있던 주민들을 탈출시키려 했으며 이 때문에 주모자 7명이 검거됐다.

괴산읍에서는 3월 19일에 이어 3월 24일, 3월 29일, 4월 1일 모두 4차례에 걸쳐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괴산읍내의 시위를 비롯하여 괴산군내 다른 지역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3월 30일에는 청안면에서 3000명, 4월 1일에는 청천면에서 3000명, 4월 2일에는 장연면에서 400명, 4월 3일에는 소수면과 칠성면에서 340여 명, 4월 10일에는 광덕리에서 300여 명이 시위에 참가하는 등 읍내 못지않은 대규모 시위가 각 면에서 있었다.

특히 청안면에서 3천명 이상이 참가한 사실이 일본 측 기록에서 확인되며 당시 출동한 일본군의 발포로 6명의 주민들이 희생당할 정도로 격렬하게 저항했다.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괴산에서는 1919년 3월 15일 이후 4월 중순까지 58회 이상의 시위가 있었고 이로 인해 검거된 주민들만 268명에 이르렀다.

6명이 현장에서 살해당했으며, 이후 4명 이상이 부상 또는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청안만세운동유적비= 우리 민족이 일제에 항거해 거족적으로 봉기한 1919년의 3·1운동은 서울을 기점으로 전국각지에 메아리쳤다. 괴산 청안의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30일 장날을 기해 매우 조직적이고, 극렬하게 전개 됐다. 약 3000명의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그러니 온 장안은 들끓는 함성과 물결치는 태극기로 천지가 진동했다./1985년 건립, 청안면 읍내리 소재

1. 괴산읍의 3·1운동

3·1 운동이 일어나자 괴산에서는 3월 19일 읍내에서 가장 먼저 시위가 시작되었으며, 이날의 주동은 홍명희였다.

서울의 독립선언서 낭독과 선언식을 본 홍명희는 3월 15일 고향으로 돌아와 직접 경고문, 격문을 작성했다.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 300매를 인쇄하는 한편 동지들을 규합할 계획을 세웠다.

홍명희는 3월 18일 삼촌 홍용식, 동생 홍성희, 서부리 이재성, 김인수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들 외에 함께 했던 동지로 청주공립농업학교 홍태식, 괴산면에 거주하던 윤명구, 심형택 등이 있었다.

이들은 3월 19일 괴산읍내에서 군내 최초의 독립만세 운동을 시작했다.

이날의 시위는 충북지역에서도 가장 먼저 발생한 것으로 처음부터 격렬하게 전개됐다.

경찰은 이날 만세운동이 일어날 것을 미리 눈치 채고 주모자 3명을 예비검속하는 한편 읍내 경계를 엄격히 했다.

그러나 나머지 인사들이 약속한 대로 독립만세시위를 시작했다.

오후 5시경 시장의 군중들이 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돌입하였다. 이 시위에는 괴산공립보통학교의 4학년 급장 곽용순 등 35명의 학생도 참가했다.

시위에 놀란 일본경찰은 다시 시위주동자 17명(또는 18명)을 검거하였다. 그러자 오히려 시위대는 600여 명으로 늘어나 괴산경찰서로 몰려갔다.

분노한 군중들은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자 일본 경찰은 이 시위를 진압하려 했다.

그러자 성난 군중들은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이에 겁을 먹은 경찰은 일본군 충주수비대와 인근경찰들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일본군 수비대는 20여 명을 긴급히 파견하여 응원경찰과 함께 시위 진압에 나섰다.

시위 군중들은 밤 10시경이나 되어 해산 당했으나, 다시 여러 집단으로 나뉘어 새벽 2시까지 시위를 계속했다.

이날 괴산경찰서는 3회에 걸쳐 군중의 공격을 받았다. 이날 연행된 주동자는 홍명희, 이재성, 홍용식, 홍태식, 김인수 등이었고, 홍명희는 징역 2년 6개월, 이재성은 징역 2년, 홍용식은 징역 1년 6개월의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3월 19일 만세시위에 이어, 3월 24일에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이날의 만세운동은 홍명희의 동생 홍성희가 주도했다.

이날 역시 장날이었고, 일본 경찰들이 엄한 경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후 6시부터 700여 명이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가 시작되자 경찰관과 충주수비병들의 진압이 있었으나 시위는 밤 11시까지 계속되었으며, 시위대의 투석으로 인해 군청유리창이 파손됐다.

소수면서기였던 김인수는 지난 3월 19일 시위에 가담하여 연행되었다가 훈방되었으나 이날 다시 시위에 가담한 것이었다.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김인수는 위 홍성희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중 홍성희가 괴산경찰서에 연행되자 분개하여 군중 앞에서 모자를 벗어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했다고 한다.

한편, 음성군 음성시장 상인 민광식은 시위대가 경찰에 체포되자 괴산읍내 수진교에서, 권담은 괴산읍내 인산교에서 버티고 서서 귀가하는 군중들에게 ‘우리 동포가 체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집에 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니 모두 장터로 되돌아가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울면서 가두연설을 했다고 한다.

이날 김인수를 비롯하여 괴산면서기 구창회, 홍성희, 민광식, 권담 등이 검거되어 징역 1년 및 징역 10개월 등의 형을 선고 받았다.

3월 29일 오후 6시 괴산시장에 모인 1,500여 명의 군중들이 또 다시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하였다.

이 날의 시위는 오후 8시 30분에 해산 당했으며, 일본 측은 경찰보조원 1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4월 1일에도 다시 1,000여 명의 시위 군중들이 면사무소로 몰려가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했다.

1차 이후의 시위는 검거당하지 않았던 주동자들 외에 이들과 사전 협의가 없었던 인사들도 적극 참여했다.

특히 보통학교의 학생들이 궐기에 가담하여 시위의 규모와 격렬함이 더욱 강해지게 되었다.

시위가 거듭됨에 따라 모인 군중의 규모도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1차 600명에 이어 2차 700명, 3차 1,500명, 4차 1,000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계속했다.

계속된 시위에서 경찰서, 군청, 우편소 등이 공격당한 것으로 보아 이 시위가 일본의 지배에 저항하는 성격을 가진 매우 격렬한 것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3월 19일, 24일 이후 연행된 인사는 민중식, 오운용, 송능식, 이종화 등이었으며 학생으로는 곽용순, 이병석, 윤명구 등이 있었다.

소수만세운동유적비= 소수면민의 독립만세시위는 1919년 4월 2일 새벽 2시경에 옥현리에서 500여명이 독립만세를 외치고 면사무소를 습격하려 하였으나, 일본경찰에게 저지를 당했다. 밤 8시경에는 300여명이 길선리에 있는 면장집에 몰려가 면장을 앞세우고 경찰관 주제소를 습격했다. 그러면서 각 동리를 순회하면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1985년 건립, 소수면 수리 소재

2. 소수면의 3·1운동

소수면의 시위는 3월 19일 괴산읍 만세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시위가 시작되자 소수면 주재소 경찰들이 주동자를 연행했다.

그러자 시위 군중들은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더욱 격렬하게 시위를 벌였다. 시위 군중의 기세에 눌린 경찰은 어쩔 도리 없이 연행한 주동자들을 석방하였으나 군중이 해산한 후 다시 이들을 연행하여 괴산경찰서로 이송했다.

4월 2일 다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번에는 면장을 앞세운 것이었다.

이 시위는 유해륜, 경권중, 송능식 등이 주도하였다. 이 시위에 앞서 유해륜과 경권중은 먼저 길선리에 사는 소수면 면장과 주재소를 찾아가 조선독립만세를 함께 불러 독립을 앞당기자는 주장을 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논의 끝에 4월 2일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던 것이었다. 마침내 4월 2일 소수면 주민 200여 명이 소수면장 김승환의 집과 주재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날 구장 경권중과 유해륜은 같은 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시위대에 합류했으며, 송능식은 시위대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주도했다.

이 시위로 유해륜, 경권중, 송능식 등 3인은 각각 10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경권중은 고문으로 생긴 질병으로 인해 가출옥했으나 얼마 후 이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3. 연풍면의 3·1운동

연풍면의 만세시위는 박봉석과 조세기 등의 주도로 3월 28일 오후 6시경 일어났다.

박봉석과 조세기는 주진리 주민들로 이날 연풍공립보통학교 앞에서 만세시위를 하다가 일본 경찰에 연행되었으며 불온언동이라는 죄목으로 90대의 태형 처분을 당했다.

4. 장연면의 3·1운동

장연면 오가리 신촌마을에 살던 김의대, 김의현 형제와 박영래는 고종의 인산에 참예한 후 3월 26일 귀향했다.

이들은 만세시위를 목적으로 정해문, 양신집, 지민수(다른 이름 지도원), 김일곤과 비밀리 모임을 갖고, 4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한 후 동지들을 규합하는 한편 선언서와 태극기를 수백 매씩 준비하여 박영래로 하여금 각 마을에 배포하도록 했다.

드디어 4월 1일 정오 약속대로 장연면 사무소 앞에 오가리 주민들을 중심으로 수백 명의 군중이 모여 들었다.

시위대의 앞에 있던 김의현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김의대가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를 따르던 시위 군중들은 면사무소로 돌진하여 건물 일부를 파괴했다.

시위를 마치고 귀가한 김의현 등은 다음 날 다시 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의했다.

일제 법원의 판결문에 따르면, 김의현은 ‘4월 2일 면사무소 앞에서 조선독립만세 시위를 할 예정이며, 만일 이에 가담하지 않을 경우 마을을 공격하겠다’라는 취지의 통문을 작성하여 추점리, 광진리, 방곡리, 조곡리 등 각 마을에 회람시켰다고 한다.

이에 양신집, 김일곤, 지도원, 정해문 등이 찬동하여 주민들을 조직하였다. 4월 2일 밤 2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다시 모였다.

이들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다시 면사무소를 공격하여 건물 일부와 민적부(民籍簿, 제적등본) 9권 등 문서를 파괴했다.

연풍면에 있던 일본군 파견대가 이 소식을 듣고 4월 3일 장연면에 도착하여 시위를 주동했던 인사들을 연풍으로 연행했다.

재판을 받은 김의대 등 7인은 징역 8월~3년의 형을 선고받았으며 이들 외에도 황만모, 조병두, 박용문, 조규민 등도 징역형을 당했다. 김의대와 김의현은 호된 고문과 악형으로 출옥 후 요절했다.

이 사건에 대해 일본 측 기록은 ‘4월 1일 오후 7시 100여 명의 군중이 장연면사무소를 공격하여 기물과 서류를 파괴했으며, 면장집이 공격을 받아 객실의 문이 파괴됐다’라고 적고 있다.

정부는 1983년 김의현에게 대통령상을 표창했으며, 1990년 김의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5. 청안면의 3·1운동

괴산읍과 소수면 등에서 만세시위가 있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청안면에서도 비밀리에 만세시위가 계획됐다.

1950년 3월 20일 청안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시위 계획이 있었으나, 이를 알아 낸 일본 경찰은 3월 19일 태극기를 7개를 압수하고 이를 소지하고 있던 주동자를 소환하여 취조한 후 훈계하여 방면했다.

그리고 3월 25일 장날에 일본군은 경찰관 응원병 7명으로 시장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날 것을 경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태갑, 김수백, 신강면, 장성원 등은 1950년 3월 30일 청안 장날을 택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이태갑은 증평 도안, 장성원은 사리면, 신강면은 청천일부를 책임지고 주민들을 조직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해 나갔다.

이 날은 장날로 이미 3천여 명이 모여 있었다. 당시 괴산 남부 4개면에 시장이 설치된 곳은 청안뿐이었다.

오후 3시 반경 청안시장에서 괴산연락원 이모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이어 이태갑이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장터에 모인 군중들이 모두 이에 호응했다.

일제 식민 통치에 분노한 시위 군중은 우편소를 습격하여 우편물과 사무실 집기를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 경찰이 박홍균, 이종규 등 주도자를 체포하여 청안 주재소로 연행했다.

그러자 박내명, 함재원 등 격분한 시위 군중이 주재소로 몰려갔다. 주재소 앞에서는 김수백의 주도로, 체포된 지도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히 항의했다.

이들은 “어째서 너희가 죄 없는 조선인을 체포하는가? 즉각 석방하라”라고 외쳤다.

이태갑 등은 군중과 더불어 앞장서서 주재소 뒷문 근처에 있던 우물에서 쌓아 놓은 돌을 떼어 내 던지기 시작했다.

이에 겁을 먹은 일본경찰이 발포하여 희생자들이 발생하였다. 다시 전열을 정비한 시위군중은 주재소를 향해 돌격하여 결국 주재소 경찰관들은 모두 도망하기에 이르렀다.

성난 시위대는 근처에 있는 우체국으로 몰려가 공격했다.

그러나 잠시후, 시위 군중은 주재소를 지원하기 위해 도착한 30여 명의 무장한 일본군 충주 수비대와 서천교 둑에서 대치하게 됐다.

뒤이어 증원된 일본군이 도착하여 시위가 진압되었으며, 주재소를 이들에게 다시 점거당했다.

이어, 일본군은 해산된 군중들을 무차별 검거하였는데, 이 때 연행된 군민들은 100명이 넘었다.

당시 일본군의 무차별 발포로 모두 6명이 희생당했으며 4명이 부상당했다.

당시 희생당한 청안면 주민으로 확인된 인사는 홍봉운, 노도원, 이찬의, 연병봉, 우현우, 연병용이었으며, 부상당한 인사는 황용득, 이한의, 연병인, 연채우였다.

한편,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청안시장시위에서 희생된 인사는 청천면 4명, 괴산면 1명, 북이면 2명 등 모두 7명이었다.

연행된 이태갑, 장성원, 신강면, 박래명, 함재원, 김수백, 이준영 등은 징역 2~3년의 형을 선고받았으며, 김명진, 안낙여, 임수근, 김춘경, 연부산, 하성근, 김인준 등은 징역 8~10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6. 청천면의 3·1운동

1919년 4월 1일 오후 2시 청천시장에 모인 3천여 명의 군중이 이성태(李聖泰)의 주도로 만세시위를 벌였다. 시위대 일부는 청천면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이를 공격했다.

이에 괴산읍의 충주수비병 10명이 급파되어 시위대를 해산하고 주모자 12명을 검거했다. 그러자 시위 군중들은 이에 격분하여 다시 결집했다.

이들은 체포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밤 10시까지 계속됐다.

해산당한 후에도 시위에 참가했던 미원면의 주민 3백여 명이 시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검거된 미원면 구봉리 천도교도 이성태는 징역 8개월의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한편, 또 다른 문헌자료에 따르면, 정상열이 주동이 되어 3천여 명의 군중이 시위를 하였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주재소를 공격했으나 사상자는 없었다고 한다. 

이 시위로 인해 정상열, 이규삼, 김태열, 김경열, 하창옥, 박노태 등이 검거되어 20일 구류처분을 당했다.

일본 측은 이 사건에 대해 시위 군중이 청천시장에서 만세를 부르려 하였으나, 수비경과 경찰의 경계로 해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7. 칠성면의 3·1운동

칠성면 조규학, 홍윤식이 칠성면 태성리 조규학의 집에서 7폭짜리 태극기를 만들어 1919년 4월 2일 마을 주민 30여 명과 함께 태성리 뒷산에 올라가 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일제 법정에서 “조선 독립만세를 희망하므로, 조선 독립만세를 외칠 생각으로 태극기를 만들어 산 위에 올라 이를 흔들어 만세를 불렀다.

부락민들이 몰려 왔으므로 이들과 함께 만세를 외쳤다”라고 하면서 독립만세운동이 정당함을 주장했다. 조규학, 홍윤식은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한편, 4월 3일에는 칠성면 쌍곡리에서 시위를 일으킨 민간인 40여 명이 면사무소를 습격하려던 중 헌병에 의해 해산됐다.

8. 감물면, 문광면 3·1운동

시위 주동자였던 감물면 이용승이 일본 헌병의 검거를 피해 고향을 떠났으며, 8·15 광복 후 귀향했다고 한다. 문광면 광덕리 안창달이 시위 도중 일본 헌병의 칼에 살해당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괴산의 3·1운동은 동학농민혁명의 반외세 봉기와 조선 말 항일의병운동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참여 군중 규모나 격렬함에 있어서도 그 맥을 잇는 항일독립항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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