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왜구와의 전쟁 1
[기획연재] 왜구와의 전쟁 1
  • 괴산타임즈
  • 승인 2024.02.1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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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작가
'대마도는 본시 우리 땅이다' 시리즈
눈물의 섬 대마도를 가다 117.
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일본이 신라를 침입한 것은 문헌상으로는 기원전 50년 경이다. 혁거세 8년에는 왜 군사가 변경을 침범하려다‘시조에게는 하늘에서 내려 준 덕이 있다.’라는 말을 듣고 스스로 물러났다는 이야기가 그 시작이다.

신라는 왜구의 침략을 견디지 못하여 414년 고구려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광개토대왕릉비 비문에“왜구대궤 倭寇大潰”라는 기록이 그 증좌다.

이는 ‘왜구를 크게 궤멸시켰다’라는 의미이다. 고구려는 신라로 쫓아 들어가 가야지역으로 달아나는 왜구를 멸하였다.

신라는 고구려가 왜구를 퇴치해준 댓가를 톡톡히 감내해야 하였다. 몇십 년 동안 속국의 신세를 면치 못한 것이다.

왜구(倭寇)라는 뜻은‘왜가 도둑질한다’라는 뜻이다. 왜구는 고려말, 조선초에 가장 심했고, 특히 고려 말 약 40년간은 극도로 악랄해져 고려 멸망의 요인을 제공한다.

일본어로는 와코(わこう)라고 하여, 도적의 상징으로 비하하여 부르면서도 일본인 학자 중에는 처음에 대부분 일본인이었으나, 왜구가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구성된 해적 집단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 ‘왜구는 일본의 전국시대에 규슈 일대 중소, 지방 다이묘의 지휘를 받고 움직인 일종의 군사, 사략 집단’이었으며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고려인이나 조선인의 수는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왜구는 흔한 해적이 아니라 나중에는 왜 조정에서 파견하는 정규군 수준으로 성격이 변모해 버렸다. 왜구는 규슈 일대의 일본인들로서, 주요 근거지는 대마도·마쓰우라〔松浦〕·이키〔壹岐〕등이 활동 무대였다.

그러나 신라가 왜구에게 당하고 견디는데 그친 것은 아니다. 일본 기록에 신라 군사가 오사카에서 1백 리 떨어져 있는 명석포에 쳐들어왔다고 되어 있다.

적간관(赤間關) 동쪽에 한 구릉이 있는데 왜인들은 이것을‘白馬墳’이라 부른다. 신라 군사가 일본에 깊이 쳐들어오니 일본이 화친을 애걸하고 군사를 풀어주기를 청하여, 백마를 죽여서 맹세한 뒤에 말을 이곳에 묻었다는 얘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렇게 오히려 통일신라 때는 큐슈의 왜구를 직접 쳐들어가 척결할 때도 있었다.

고려 1223년(고종 10)에 왜구가 김해에 침입했다는 기록이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이때 고려 정부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 왜구의 통제를 당부하여 노략질을 진정시킨다.

이렇게 고려와 일본 정부는 외교적으로 양국 간의 마찰을 해결하는 비교적 완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일본에게 항복을 권하러 간 원과 고려의 사신단 중에서 고려의 사신을 살려준 예에서도 엿볼 수 있는 일이다.

1274년의 여원연합군의 일본 정벌은 태풍으로 인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충렬왕은 1278년 원나라 세조에게 2차 정벌의 의지를 피력한다.

이때 일을 '고려사 일본전'은 “일본은 원나라의 은덕에 보답할 마음이 없습니다. 함선을 건조하고 식량을 비축하며, 일본의 죄를 밝혀 토벌하려고 합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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