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대마도의 천인 귀무덤
[기획연재] 대마도의 천인 귀무덤
  • 괴산타임즈
  • 승인 2024.01.22 12: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석우 작가
'대마도는 본시 우리 땅이다' 시리즈
눈물의 섬 대마도를 가다 116.
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대마도의 상대마도 가와우치, 히코텐성 남쪽 자락에 조일전쟁 때 조선인의 자른 귀를 묻고 돌을 모아 덮어둔 적석묘(積石墓)가 있다.

히타카스항에서 관광버스로 30분쯤 가면 만날 수 있는 이른바 ‘귀무덤’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전진 기지였던 대마도에는 왜장들의 축성이 있고 그 가까운 거리에 부속물처럼 귀무덤이 끼어 있다.

『상대마정지(上對馬町誌)』에는 이를 “천인 귀무덤” 또는 “공양불 터”라고 기록한다. 부산 지역 8500명의 귀가 잘려져 이곳으로 온 것이다. 그 한스러움이 얼마나 컸을까? 그러나 성하의 계절에는 무성한 풀 속에 묻혀 그 여한의 자취를 찾아보기 쉽지 않다.

칠천량 전투에서 원균을 패퇴시킨 왜군은 사천에서 남원으로 길을 열고 들이닥친다. 풍신수길의 명에 의하여 조선인들은 도륙되어 그들의 전과로 속속 보고 되는데, 이를 믿지 못하는 수길은 그 증거물로 귀를 잘라 보내라고 하였다.

부하들이 귀 두 개를 잘라 전과를 부풀리자, 한 사람이 한 되씩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 보내라고 명령을 바꾼 것이다. 그리고 영수증을 발급해주며 숫자에 따라 토지까지 나누어 주었다.

왜군들은 전과의 셈법 변화로 턱없이 수량이 부족해지자, 일반 백성의 여자와 아이들 코까지도 베어 숫자를 부풀렸다.

이렇게 전리품이 귀에서 코로 바뀌어 버리니, 대마도까지 이송된 귀는 전리품으로서 가치를 잃게 되어 교토까지 전달되지 않고 그냥 대마도에 묻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밭두렁 사이 풀숲에 육신을 잃어버린 조선인의 귀가 1.5㎥ 크기의 돌무지 안에 방치되었다.

어쩌다 바람이 불면 돌무더기 사이로 뾰족하게 잎새를 내보이는 풀잎이 더욱더 처연하다. 400년의 세월을 침묵하고 있는 슬픈 조각의 한스러움이 작은 바람에 파르르 영혼을 떨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귀무덤은 교토, 대마도, 후쿠오카, 오카야마, 등 총 5곳에 이른다. 이른바 조선의 병사와 무고한 민간인 12만 6천여 명의 귀나 코가 묻혀있는 이비총(耳鼻塚)이다. 오카야마 코무덤은 천명의 코무덤이라 해서 천인총(千人塚)이라 이름한다.

가톨릭을 믿는 왜장들이 많아 참회의 뜻으로 남긴 신앙심의 표식이랄 수 있다.

일본 교토역 부근의 교토국립박물관 옆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킨 풍신수길을 신으로 받드는 신사와 그의 무덤이 있다. 무덤의 정문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조선인의 귀무덤이 있다.

왜군에게 끌려와 교토에 살던 조선인 2천여 명은 히데요시가 죽은 후 귀무덤의 원혼들을 위하여 제를 올리기도 한다.

강항 선생은 간양록(看羊錄)에 ‘조선인의 신체를 소금에 절이도록 명령한 풍신수길이 죽자, 그의 부하 토쿠카와이에야스 등에 의해 소금에 절여진 것’은 잉과응보라고 지적하였다.

풍신수길이 사후 당분간 그의 죽음을 은폐하기 위해 부하들이 수길의 썩지 않도록 복부에 소금을 넣고, 겉에는 관복을 입혀 놓았던 사실을 두고 한 말이다.

이비총의 총 본산이 되는 이 무덤 봉분 꼭대기에는 풍신수길의 무덤과 똑같은 오륜 석탑이 서 있다. 그러나 조선인의 해원을 위한다는 명분이 느껴지기는커녕 전과를 과시하기 위한 왜인들의 비릿한 코웃음이 맴돌 뿐이다.

1597년 음력 9월 16일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일본 수군 2만 4000여 명을 멸한다. 울돌목에서 격퇴당한 왜군 시신들이 진도 해안으로 밀려와 물이 빠지자, 진도대교와 가까운 군내면 둔전리, 고군면 오류리, 연동리, 내산리, 원포리, 벌포리 등의 개펄에 엎어져 있었다.

진도 사람들은 내산리 내동마을에 있는 왜덕산(倭德山)에 시신들을 안장해주고 고이 명복을 빌어 주었다.

이 시점은 정유재란 때의 일본군 종군 승려 경념(慶念)의 1597년 11월 19일 일기의“남녀노약을 사서, 노끈으로 목을 묶어 한데 모아 앞으로 몰아가는데 걷지 못하면 뒤에서 막대로 내몰고, 때려서 달리게 하는 광경” 부분에서 확인되듯이 왜병들의 잔혹함이 극에 달하던 때였다.

“조선의 아이들부터 부녀자에 이르기까지 코를 잘라 대바구니에 담고 병사들은 피투성이가 된 바구니를 허리춤에 달고 싸웠다.”라는 일기의 대목을 읽는 순간 진도의 와덕밭(왜덕산) 사람들의 바보 같은 휴머니즘에 가슴으로 밀물처럼 슬픔이 차오른다.

정유재란 후 새 통치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막부는 조선통신사들에게 혐오감을 덜 주기 코무덤을 귀무덤(이총)으로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에서도‘이때 우리나라 사람 중에 코 없이 살던 사람이 많았다.’라며 코 없는 사람을 언급하고 있다.

슬픔의 크기는 요량할 수 없으나 그 느낌은 천둥처럼 가슴에 떨어져 흐느낀다.


  • 충청북도 괴산군 관동로 193 괴산타임즈
  • 대표전화 : 043-834-7008 / 010-9559-6993
  • 팩스 : 043-834-7009
  • 기사제보/광고문의 : ssh6993@hanmail.net
  • 청소년보호책임자 : 노원래
  • 법인명 : 괴산타임즈
  • 제호 : 괴산타임즈
  • 등록번호 : 충북 아 00148
  • 등록일 : 2014-12-29
  • 발행일 : 2014-12-29
  • 발행인 : 노원래
  • 편집인 : 노원래
  • 괴산타임즈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괴산타임즈. All rights reserved. mail to ssh6993@hanmail.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