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장롱
할머니의 장롱
  • 괴산타임즈
  • 승인 2023.09.18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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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신의 詩로 쓰는 컬쳐에세이
이승신 시인님 괴산나드리
이승신 시인님 괴산나드리

나의 집에는 오래 묵은 장롱이 좀 있는데 다른 가구와 그런대로 잘 어울려 주고 그 묵직한 빛과 순박한 모양은 조선시대 분위기의 한 조각을 떼어다 놓은 듯 해 내 마음을 안정시켜 준다.

그 중 넉 자 정도 중형 키에 짙은 빛으로 옛 자개가 촘촘히 박힌 장은 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을 찌르르 아리게 한다.

워싱톤에 살던 나에게 할머니가 보내주신 장이다.

워싱톤에서 일하던 어느 날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그걸 펴보고는 아, 할머니가 죽음 준비를 하시는구나 하는 직감으로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 했다.

그 장롱은 할머니가 평생 지니고 애지중지한 장으로 예전 궁에서 상궁에게 직접 받은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장롱에도 격이 있다면 은은한 빛으로 높은 격이라 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보아 온 그 장은 할머니 방 아랫목에 늘 푸근히 자리하고 있어서 할머니와 동격으로 보였다.

그런 정 깊은 물건을 내가 서울에 다니러 갈 때 그리운 사람들과 함께 그리운 풍경으로 보게 하지 그 무거운 걸 뭐 하러 멀고 먼 미국 땅까지 힘들여 보냈나 싶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몸보다 첫 손녀딸을 아끼고 사랑해주신 할머니를 고마워하기보다 못 마땅해 하기도 했다. 그런데 세상이 혼란스러워 서인지 나이 들어서인지 할머니 생각이 부쩍 나는 요즈음이다.

일찍이 와세다 대학 유학으로 동경서 신혼을 함께 한 할아버지가 6 25 때 납북되어 홀로 남으신 할머니는 그 사랑을 어린 나에게 쏟으셨다. 한 없이 치켜 주셨고 한 없이 자랑스러워해 주었고 한없이 용서해 주었다.

그 덕에 열등감 없이 자라고 올바른 마음을 지니게 됐다고 믿는다. 그런데 커서는 바른 소리를 듣지 않으려 했고 젊은 세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신경질도 부렸다. 그 모든 걸 다 아시면서도 끝없이 끝없이 덮어주신 할머니.
외로운 일생과 고생하신 말 년을 생각하면 절절한 연민으로 가슴이 저며온다.

빙판에 넘어져 대수술을 두 번이나 받으신 후로는 그야말로 나무 같이 되었다. 미국에 간 후로는 그리워하시다, 서울에 갔을 때에 알아보지 못 하신 걸 생각하면 슬프다.

애인같이 끼고 기른 적이 없다는 듯.

그 뛰어난 머리, 나의 뇌리에 새겨져 있는 아름다운 용모. 눈부시게 희디흰 살결. 늘 친구들이 따르던 대장 할머니는 누구나 인정했듯 눈에 띄게 아름다웠고 초등학교나 여학교 때 데모라도 있는 날이면 학교로 나를 찾아오셨는데 그러면 내 어깨가 으쓱해졌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한 세기도 넘어 전 한국에서 태어나 여성으로 받은 억울함과 불공평, 그 한이 어떠했겠는가는 상상을 넘을 것이다.

내 생애 최초의 기억은 초량으로 피난 가 새벽 4시에 갓난 나를 안고 두 손 모아 간곡히 기도하던 할머니의 모습이다. 그 장면이 지금도 꿈을 꾸듯 영화 장면이듯 눈에 어린다.

그 후로도 새벽마다 같은 시각에 기도 드리는 걸 보았다.

아, 정숙하게 단정하게 기도 드리던 그 모습.

곁에 계시어 깊은 연륜의 경험과 삶의 지혜를 얻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그게 얼마나 필요할 때인가.

손수 심으신 마당의 자목련과 매화, 빨간 잎 단풍나무를 유난히 좋아하시던 할머니. 배탈이 나면 따뜻하고 두툼한 손으로 배를 쓱쓱 문질러 주시던 할머니. 나는 왜 그저 아파져서야 그 손을 그리워하고 힘든 지경이 되어야 정성으로 길러주신 것을 떠올리는가.

생각하면 둘이 나눈 추억이 참 많은데 할머니는 나를 두고 가셨다.

태평양 건너 미국으로 갔다가 한참 후 다시 서울로 돌아온 그 장롱을 할머니 보듯 바라다본다. 양 기둥에는 부귀다남 자손창성 富貴多男 子孫昌盛 이라고 한자로 글까지 새겨져 있다.

못뵌 지 34년, 친히 새기신 듯한 그 바램을 바라보며 할머니의 사랑과 너그러운 마음이 전율처럼 닿아오는 가을 냄새 시작되는 한 밤이다.

너무 일찍 갈 사람에게 정을 들이는 게 아니었다
아아 할머니~

- 이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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