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한민족의 위대한 선택
[기획연재] 한민족의 위대한 선택
  • 괴산타임즈
  • 승인 2023.06.26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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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작가
'대마도는 본시 우리 땅이다' 시리즈
눈물의 섬 대마도를 가다 108.
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백제와 왜의 연합군은 663년 8월 백강(백촌강)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게 대패하였다. 이것은 백제의 멸망을 의미한다.

일본 열도로 탈출한 백제유민들은 대마도와 이키섬으로 탈출하여 667년 백제의 달솔인 도호슌쇼(答春初)는 유민들을 지휘해 대마도의 아소만(淺茅灣) 옆 산꼭대기에 가네다성(금전성)을 쌓았다. 이 백제식 산성은 후에 복원하면서 조선 산성의 방식이 이다.

이 백제식 산성으로, 부여의 부소산성(扶蘇山城) 토루(土壘)와 비슷한 축조 방법이다. 답춘초가 백제식 산성을 축조하여 벼슬을 받을 만큼 일본 열도의 방어 구축에 큰 역할을 하였다.

부소산성 내 백제 포곡식 성은 기본적으로 판축으로 만들어졌는데 이곳 가네다성 또한 현재의 흙류 밑에 새로운 흙류 판축이 확인되고 있다. 제2 성문에서는 초석 건물의 문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성내에는 면이 평평한 돌을 깔아 계단을 만들었다. 제1성문 후배부에는 판자기둥 건물터가 2개나 발견되었다.

670년 왜국은 국명을 일본으로 변경하였고 통일신라와는 적대국으로 변하여 통교가 뜸해진다. 세월이 흐르자 대마도에는 신라어 통역관까지 생겨났다. 9세기에는 신라 해적이 일본을 침공하고, 894년에는 대마도를 두 차례나 공격하는 일도 벌어진다.

백제를 무너뜨린 당나라는 667년 9월부터 고구려를 공격하여 다음 해 9월 평양성이 함락시킨다. 압록강 이북의 40여 성은 계속 항전하였으며, 안시성은 671년 7월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700년 고구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고구려까지 점령하자 당나라는 이제 본격적으로 마각을 드러낸다. 신라에 계림도독부를 설치하고, 복속하라고 압력을 가하였다. 신라는 당나라와 끝까지 싸워 한민족의 뿌리를 유지할 것을 결의하였다. 당나라와 손잡고 백제를 무너뜨린 것은, 한민족의 대의를 생각할 때, 최악의 졸렬한 선택이었으나 끝까지 한반도에서 민족혼을 지켜내겠다는 결의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은 비열하게 외세를 끌어들여 한민족을 패망의 늪으로 빠뜨린 신라에 대해 씻을 수 없는 원한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은 육지와 해양에서 10년 가까이 ‘나당전쟁’에 참여한다.

힘을 얻게된 신라군은 671년 10월 당나라의 군수선 70여 척을 격파했고, 675년에는 20만을 경기 양주전투에서 물리쳤다. 676년 11월에는 금강 하구 해전에서 당군 4000 명을 수장시킨다.

고구려, 백제 유민들이 신라군에 합류하여 한반도에서 이민족을 축출하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성하게 도운 것이다.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의 선택은 위대한 것이었다. 신라에 대한 복수심을 억누르고 한반도에서 당나라를 몰아내고, 신라를 통해 삼국을 통일의 대업을 완성하게 하였으니 이 얼마나 위대한 선택인가.

대마도의 카네타 제1성터
대마도의 카네타 제1성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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