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괴산일기 5.
[독자기고] 괴산일기 5.
  • 괴산타임즈
  • 승인 2023.01.25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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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식 전 수학교사
최재식 전 수학교사
최재식 전 수학교사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툭하면 감동하지요. 하얀 눈길을 걷기만 해도 감동하는데, 세상 온천지에 내린 하얀 눈속을 걷다 보면 어린 왕자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 부부는 어린 시절의 소년 소녀로 돌아가 눈으로 덮인 세상의 비밀을 엿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너른 밭에 배추가 캐지도 못한 채 얼어 있는 광경을 보고 말았습니다. 배추를 캐봐야 인건비도 안 나오기에 그대로 방치된 채 겨울을 맞이했고 농부의 한이 서려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가을이 시작되면서 폭등했던 배춧값이 어느 순간 폭락하고 말았지요. 배추가 자라는 것은 자연의 순리이지만, 배춧값이 정해지는 것은 자본의 논리이겠지요. 얼어붙은 배춧밭을 바라보는 우리 마음도 얼마간 쓸쓸해졌습니다.

둑길 곁을 흐르는 하천에는 살얼음 위로 가루눈이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가루눈은 왜 뭉쳐지지 않냐고 물어보길래 가루눈은 물기가 없어서라고 과학적인지 시적인지 아리송한 대답을 했습니다. 촉촉이 젖지 않는 존재는 뭉치기 어려운 법이지요. 그러고 보니 가루눈이 하얀 모래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반면에 눈물 많은 우리는 밤마다 뭉칩니다. 물론 술로 뭉치는거지요. 한파주의보 속에서도 포근한 한낮의 날씨 덕분에 세상은 적요롭네요. 햇살은 가루처럼 뿌려집니다. 쟁반 위에 옥구슬이 사르랑사르랑 굴러가듯 어디선가 맑은 화음이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아무도 타지 않은 자전거 길을 걷는데 구름 속에 가려졌던 태양이 구름을 열치며 노오란 불빛을 선사합니다. 그러면 세상은 새롭게 창조됩니다. 우리는 긴 그림자와 동행하면서 따뜻한 햇살이 허락한 안온한 길을 걸어갔습니다. 어쩐지 발끝의 촉감도 따뜻해져 옵니다.

당신도 그런 경험이 있나요? 설원을 걷는데 분명히 영하의 날씨인데 포근함을 느꼈던 적 말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그 순간 시인이었을 겁니다. 시인이 별거 있나요? 세상을 낯설게 느끼면 시인이지요.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가슴속 울림의 언어를 노래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산책을 하면서 연방 도시에서 느끼지 못하는 행복이라고 자족에 빠져버렸습니다.

두시간 가까이 걸었는데 만보를 채우지 못하고 7천보를 겨우 넘겼습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느림보 걸음을 했나 봅니다. 첩첩 산을 보느라, 하늘 위를 유영하는 구름을 보느라, 하천 살얼음 아래 흐르는 물소리를 듣느라, 무리지어 낮게 날아가는 참새 무리에 깜짝 놀라느라 도무지 빨리 걸을 수 없었답니다.

눈썰매가 있다면 아내를 태우고 한껏 달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차피 아무도 걷지 않는 길이라 부딪칠 일도 없고, 내리막길이 아니라 미끄러질 일도 없습니다. 어느 해 겨울에는 눈이 내리지 않아 겨울 같지 않았는데 올해는 12월부터 눈이 많이 내립니다. 아내는 그것이 기후 이상 때문이 아닌지 걱정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눈 내린 설원을 걷는 것은 낭만입니다.

겨울은 해가 짧아 4시 남짓인데도 산마루에 걸쳐 있는 해가 하천 위에 노을을 드리웁니다. 얼지 않은 하천 물이 살얼음 아래로 흐르는데 그 위에 노을이 비치는 겁니다. 세밑 태양이 지는 모습을 하천의 노을에서 감상하는 것도 운치 있는 일이지요. 사실 그 보다 멋진 풍광은 하얀 설원 너머로 해지는 장면입니다. 이국적인 느낌도 들기도 하고 멕케닛 로니나의 음악이 들려오는 것처럼 심장에 해일이 밀려듭니다.

대설주의보가 휩쓸고 간 마을에 어떤 피해가 있었는지도 모른 채, 낭만 버전으로 산책을 한다는 것이 텃밭 농사를 짓는 귀촌 생활의 호사일는지 모르겠습니다. 엄동설한에 기름값이 무서워 제대로 난방도 틀지 못하고 펠렛 난로에 의지해 추운 겨울을 견디는데 이만한 호사는 누려도 될 듯 싶습니다. 캄캄한 어둠 속 어슴 푸른 설원 위로 떠오르는 겨울 별은 추울수록 맑게 빛납니다. 오늘 밤에도 오리온 자리 알파별 베텔 게우스 그 시린 별빛을 보러 나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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