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괴산일기 3.
[독자기고] 괴산일기 3.
  • 괴산타임즈
  • 승인 2022.12.12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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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식 전 수학교사
최재식 전 수학교사
최재식 전 수학교사

텃밭 농사의 마무리는 김장입니다. 감자와 고구마와 옥수수등 구황 작물도 심었지만 그건 한 철의 먹거리일 뿐입니다. 일년 내내 우리 식탁의 기본을 지켜주는 김치를 담그는 김장이야말로 가장 큰 행사입니다. 김장을 위해 배추와 무 뿐만 아니라 많은 작물을 심었습니다. 속을 만드는 재료로 쓰이는 갓과 대파와 쪽파가 텃밭 한 귀퉁이를 차지했습니다. 김치의 식감을 높이기 위해 배도 유용하게 쓰입니다. 배나무에서 배를 딸 때만 해도 김장용으로 사용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김치 속을 버무리는데 반드시 필요한 고춧가루는 문경 사는 친구에게 구입했습니다. 내년에는 고추도 심어야 할 것 같습니다. 천일염도 구입하고 멸치 액젓과 새우젓도 준비했습니다. 김치 속들을 버무려 하나로 화합하는데 큰 역할을 할 찹쌀풀과 육수도 준비했습니다.

김장의 1단계. 배추와 무와 파를 뽑아 다듬는 일입니다. 배추는 끝단을 자르고 반으로 쪼갭니다. 칼로 배추를 자를 때 쩍 갈라지는 느낌을 아시는지요. 수박이 한 치의 망설임도 말 그대로 쩍 갈라진다면 배추는 마지막 인연의 끈을 놓치 않은 채 쩌억 갈라집니다. 내 이별의 방식은 배추를 닮은 것 같습니다. 소금물에 절이기 위해 반으로 가른 배추 위에 다시 칼 자국을 냅니다. 집사람이 전문가마냥 배추에 툭툭 소금을 뿌려서 내게 주면 나는 커다란 비닐 주머니에 차곡차곡 담습니다. 소금물에 배추를 골고루 절이기 위해서는 야밤에 나와 비닐 팩을 뒤집거나 흔들어 주어야 합니다. 짭조름한 소금 맛이 제대로 나기 위해서는 야밤의 흔들기가 필수입니다. 무는 잘 씻어서 3등분을 한 다음 채로 썹니다. 손가락이 채칼에 베일까봐 머뭇거리는 것은 하수의 일입니다. 오랜 세월 채를 썬 사람은 아슬아슬할 때까지 거침없이 무를 쓱쓱 밉니다. 쪽파 다듬기는 손톱 끝이 새카매질 때까지 껍질을 벗기고 상한 끝단을 잘라내는데 시지푸스처럼 한나절 쉬지 않고 반복해야 합니다. 무념무상으로 하는 것이지요.

김장의 2단계. 12시간 이상 소금물에 절인 배추를 씻는 일입니다. 배추를 제대로 씻기 위해서는 3단계의 공정을 거칩니다. 대야를 3개 준비해서 배추를 옮겨가며 씻습니다. 이 작업은 마당 수돗가에서 해야 제격입니다. 흐르는 물에 마지막 헹굼을 한 배추를 물이 빠지게 발 위에 차곡차곡 올려 놓습니다. 마당 목조 테이블 위에 발을 깔고 그 위에 배추를 쌓는 것이지요.

김장의 3단계. 속을 만들어 버무리기입니다. 김장 속을 만들 때마다 고민은 비율이 적당한지 양은 모자라지 않는지 하는 점입니다. 레시피대로 하는 김장이 아니어서 규격화된 수치가 없으니 해마다 직감으로 합니다. 직감이 쌓이면 암묵지가 된다고 하더군요. 설명은 제대로 못하는데 그냥 하면 얼추 제대로 되곤 하지요. 예전에는 문경사는 친구 부부와 함께 해서 서로 의논하면서 했는데 올해는 고독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아내가 수시로 이 정도면 되겠지 하고 묻는데 그걸 알 리가 없는 나로서는 애매한 미소로 끄덕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올해 김장은 특별히 서울에서 막내 딸이 와서 속 버무리기 작업을 도와 주었는데 그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무렴 김장은 가족 축제이니까요. 작년에는 큰 딸도 같이 했지요.

막내 딸 예랑이는 나의 속 버무리는 속도에 깜짝 놀랍니다. 제대로 하는 거냐면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지만, 사실 난 김장 속 버무리기 베테랑입니다. 배추 잎새마다 속을 채우고 버무리는 나의 손놀림은 가히 예술에 가깝습니다. 마늘 뽑을 때도 아내가 나의 속도에 경탄과 의심의 눈길을 동시에 보냈었는데, 올해 막내 딸의 시선도 그러합니다. 나의 재능이 온당하게 평가되지 못하는 부분이 나로서는 늘 억울하기만 할 뿐입니다.

김장의 4단계. 수육과 함께 시식하기입니다. 아내가 정성껏 요리한 수육과 버무린 속을 노란 배추 겉저리에 싸 먹는 그 맛은 세상 어느 맛집의 요리 이상이지요. 어쩌면 이렇게 배추가 알차게 잘 자랐는지, 어쩌면 이리도 소금에 잘 절여졌는지, 또 김장 속은 어찌나 매콤한 지 감동의 연속입니다. 김장 후에 나르시즘은 도무지 통제가 안됩니다. 올해 텃밭 농사를 마무리 짓는 김장도 잘 된 것 같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다양한 악기가 아름다운 화음을 만드는 오케스트라처럼 김장 또한 다양한 요소들이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냅니다. 맛의 화음이지요. 어느 하나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애쓰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스미어들고 버무려집니다. 자기 맛의 고유성을 잃치 않으면서도 새로운 맛을 창출해내는 것이지요. 존재하면서 배려하는 관계의 미학입니다. 한 텃밭에서 함께 자란 존재들이기에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김장의 처음부터 마무리까지 우리 손길을 거친 김장이기에 올해 김장이 더욱 뜻깊고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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