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버지 이야기
두 아버지 이야기
  • 괴산타임즈
  • 승인 2021.12.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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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신의 詩로 쓰는 컬쳐에세이
이승신 시인이 동경 메구로 강 6키로에 늘어진 밤 사쿠라 배경으로  -  2016  3  28  동경
이승신 시인이 동경 메구로 강 6키로에 늘어진 밤 사쿠라 배경으로 - 2016 3 28 동경

예년이라면 설악산 하룻밤을 가고는 교토를 향했을 것이다.
둘 다 못 간 채 계속 서울이었다.

서울과 중부는 단풍이 끝물이라는데 시조 시인 선배의 초청으로 후배 둘과 중부인 충주를 가게 된다.

매끼를 정성으로 대접하였고 수안보 온천 호텔도 잡아 주었다.

아 수안보라~ 20 년이 훨 넘었다. 미국에서 방학에 오거나 아주 귀국한 후에도 어머니와 함께 장호원 큰 산에 혼자 계신 아버지 산소를 찾았었다.


‘산소의 잡초만 뽑노라 가신 님 위할 길 달리 없으니’
‘우리 둘 맺어지고 사십 년이 못 되는데 그대를 잃고 잊기까진 백 년 천 년’


한국에서 일생 지은 어머니의 시가 ‘일본 열도를 울리다’ 라는 큰 반응으로 나타나게 된 것은 아버지 가신 후 그 시들이 담긴 ‘무궁화 4’ 편의 영향이다. 어머니가 유명해지는 대신 아버지가 살아 계시길 내가 원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많은 분이 내가 만든 한국어 판을 보고도 일편단심 사랑의 그 마음을 칭송했는데 이름 있는 방송 후배 PD가 그랬다.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한 분이면 그리 끝없이 그 마음이 표현될까 라고.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 중 어느 쪽 때문에 그리도 좋은 관계였을까. 한 쪽만 좋아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참 어른이 되고 세상의 많은 것을 둘러보고 나서 연거푸 생각해봐도 객관적으로 양쪽이 고루 훌륭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내가 본 아버지는 이 땅에서의 생명의 길이만 빼고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는 생각이다. 백세 백선엽 장군께서도 ‘모든 분야에 탁월한 평양사범 선배님을 존경한다’ 고 늘 말해 주었다.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산을 내려가네 적막한 산에 그대만을 남기고


산소 앞에선 풀 뽑는 거 밖에 할 게 없었다.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의 DNA를 느끼는 나는 어머니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으려 슬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적막강산에 남기고 내려와 수안보로 가서 산채 비빔밥 몇 수저 뜨고는 온천에 들었었다. 가끔 근처 고사리 마을에 계신 김옥길 이대 총장을 뵙기도 했다.

괜히 위한다고 큰 산을 구해 모셨는데 저 아래 공동 묘지는 외롭지 않을 텐데~ 안타까워 하셨을 어머니도 이제는 합장하신지 20 년이 되어 간다.

수안보에 머물며 그때 엄마와 함께 하던 생각을 어제인 듯 떠올린다.

선배가 잎 진 월악산 등 여기저길 보이는데 문경새재 한 나절 걸은 것이 인상에 깊다. 많은 단풍이 졌는데도 새재에는 몇 그루가 남아 햇빛을 받아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붉은 빛이 눈부시다.

과거 보러 한양에 가려면 이 문경새재를 넘어야 했다. 선비인 듯 자세를 펴고 그 길 따라 걷는 것이 상쾌하다. 한 해에 드문 화창한 빛이 너른 주위 경관을 아름답게 했다.

한참을 걷자 우편 커다란 현판에 대성산업 사유림 이라 했고 그 아래 ‘자연 생태계 청정림 지역으로 후손을 위하여 영구히 보존한다’ 고 쓰여져 있다. 주흘산으로 걷고 있는 길고 긴 이 길이 사유지라니.

아 수십 년 전 기억이 어슴프레 난다. 어려서 친구에게 그 이야길 들었었다. 같이 간 후배는 사유림이라 쓰여 있는데도 국립공원이라고 우겼다. 엄청난 산덩어리로 사유지라는 걸 상상할 수 없어서다.

대구에서 막 전학 온 중학교 친구 돈암동 집엘 갔었다. 친구 아버지가 방에 들어오시더니 ‘아버님 이름이 뭐냐?’ 어린 나는 누구에게 그런 질문을 처음 들었고 대구에서 이제 오신 분이 아버지 이름을 댄다고 알 리가 있나~’ 하면서 답을 했다. 그랬더니 ‘아 내가 잘 아는 분이다’ 며 반가워 하신다.

그 환한 표정을 지금도 기억한다. 한참 후 생각하니 평양서 서울 오시어 고등고시 치고 들어간 것이 상공부 연료과장이었고 친구 아버지는 대구에서 석탄회사를 하실 때니 아시는 것일 게다.

당시도 세상은 좁았다.

그렇게 가끔 뵈었고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듣기 좋은 음성으로 품이 참 넓은 분이라는 인상이 있다.

말년에는 모녀시인의 집이 길로 많이 잘려나가고 일층이 세가 오래 안 나가 예술공간을 짓고는 그 안에 국내 최초 프렌치 레스토랑까지 있었는데 우리 집인지도 모르시며 아들들과 자주 오셨었다.

바로 그 아버지가 광산을 하려면 갱목이 필요하여 산림녹화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52년 전 문경새재가 있는 주흘산을 구입하고 민둥산이 된 나라를 위해 산림사업을 하는데 일생 힘을 쓰신 것이다.

그렇게 가꾸어져 입장료도 없이 많은 사람이 걷고 누리고 있다. 그 산하는 내 눈에도 국제급이어 국내 관광 1위라는데 그 속 의미까지 생각하니 가슴이 찡해 온다.

한 분은 평양과 만주에 계시다 서울로 오셨고 또 한 분은 대구에서 서울로 오신 차가 있겠으나, 빈 손으로 시작한 파란만장의 한 시대를 온 몸으로 개척해 오신 것과 훌륭한 인품으로 다 자기 분야에서 대성을 이루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태어난 목적을 분명히 알고,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오며 나라 위해 훌륭한 흔적을 남기신 두 아버지를 그려보는 귀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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