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이화령 六二五 참전 기념비와 석상건립 3.
[기획연재] 이화령 六二五 참전 기념비와 석상건립 3.
  • 괴산타임즈
  • 승인 2021.09.1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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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韓國戰爭)과 이화령전투(梨花嶺戰鬪) 7.
호국보훈의 달에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 시리즈
김근수 연구소장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한국 국학진흥원 자문위원
괴산향토사연구회 고문
김근수 연구소장.
김근수 연구소장.

앞서 언급한대로 이화령 옛길은 그 위로 신작로가 나면서 본래 모습을 잃어버렸다. 일제는 지난 1925년 한반도 도로를 선진화시킨다는 명목아래 전국 주요 도로를 확장하거나 직선화 사업을 벌리며 백두대간의 중심에 있는  이화령의 혈맥을 끊어 버렸다.

백두대간 충북사면에는 죽령, 조령, 이화령 등 3개의 주요 고개가 존재하고 있다. 이들 3개 고갯길은 시대별로 통행량이 많았다. 죽령은 삼국시대, 조령은 조선시대에 각각 활용도가 높았다. 반면 이화령은 근·현대 들어와서 활성화됐다.

현재 이화령 정상이나 그 부근으로 이화령 옛길, 이화령 국도(제3번), 중부내륙고속도로 등 3개의 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이중 이화령 옛길과 이화령 국도는 상하로 나란히 위치, 마치 '길의 아파트'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화령 정상에 서면 길도 진화를 한다'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한국전쟁 때 이화령 일대는 내륙 최고의 격전장이었다. 백두대간이 뚫리면 방어선이 낙동강으로 밀려나게 된다. 따라서 국군 6사단은 이화령에 배수진을 치고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했다.

국군은 1950년 7월 13~15일 전투에서 북한군 8백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결국 화력에서 밀려 이화령을 내주고 낙동강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동쪽 해안선을 끼고 남쪽으로 흐르다가 태백산부근에서  서쪽으로 기울어 남쪽 내륙의 지리산에 이르러 우리의 땅 근골을 이루는 거대한 산줄기로 대간의 본줄기는 내륙 깊숙이 소백산(小白山,1,421m), 죽령(竹嶺,689m), 계립령(鷄立嶺), 조령(鳥嶺), 이화령(梨花嶺, 548m), 속리산(俗離山,1,508m)으로 뻗어내려 한강과 낙동강을 남북으로 분수하고 있다.

일제는 민족정기를 끊으려는 속셈으로 1925년 백두대간의 중심 허리에 있는 이화령을 잘라  신작로를 냈다. 2012년11월15일 87년이란 장구한 세월동안 혈맥이 중간에서 멈춘 것을 치유하고 국토복원과 민족정기를 살려 놓았다.

아울러 자연생태계를 연결함으로써 온갖 동식물이 어우러지고 자연과 사람이 함께하는 생명의 공간으로 탈바꿈하며 영남과 충청이 하나가 되고 전 국민이 소통하는 성지가 되었으며 1950년 치열했던 한국전쟁의 아픔을 뒤로하고 민족정기회복과 남북통일의 서기를 잉태하는 역사의 공간이 되었다.

백두대간 이화령 복원 기공식(2012.5.16 )
백두대간 이화령 복원 준공(2012.11.15)
백두대간 이화령(이명박 대통령 친필 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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