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장 명승고적 순례’연재를 마치며
‘우리 고장 명승고적 순례’연재를 마치며
  • 괴산타임즈
  • 승인 2021.05.24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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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서 박사 / 전 공무원
주영서 박사.
주영서 박사.

이 땅에서 태어나 살아오면서 우리의 뿌리를 알고 싶어 한 일이 선조들의 숨결이 깃든 역사의 현장을 찾는 것이었다. 앞서 17회에 걸쳐 기고한 글은 기행문 형태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설화 그리고 지금 이 고장에서 구전되는 내용 등을 모아 쓴 글로서 이처럼 어떠한 사연과 결부된 명승고적의 수가 그리 많지 않으므로 연재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명승고적을 답사하는 과정에 얻은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이 땅에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자긍심이 생겼다는 것이다. 삼국시대에 괴산지역은 4세기에는 백제, 5세기에는 고구려, 6세기에는 신라에 속한 삼국 접경지역에 위치하여 백성들의 삶이 고단했을 것이지만 각연사, 공림사, 흥천사가 창건되어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국가의 중요사찰로 발돋움했다. 특히 숭유억불을 국시로 하는 조선시대에도 3개 사찰 모두 건재했던 기록이 있어 괴산지역 불교의 기반이 얼마나 견실했는가를 증명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괴산은 이름만 들어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명사와 거유의 활동무대였다. 배극렴(1325-1392), 정인지(1396-1478), 박세무(1487-1554), 이황(1501-1570), 노수신(1515-1590), 정철(1536-1593), 신경행(1547-?), 유근(1549-1627), 송시열(1607-1689), 김득신(1754-1822)…. 특히 유교의 나라 조선의 17세기를 풍미했던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 선생이 화양동에 기거하는 동안의 괴산지역은 조선을 움직이는 동력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억불 왕조 체제에서도 불교가 건재했음은, 잃는 것이 많았을 것임에도 믿음을 굳게 지켰음을 뜻하는 것으로서 눈앞에 놓인 이로움보다는 대의를 따른 선조들의 대승적 정서를 느낄 수 있으며, 유교의 나라에서 그 중심에 떠올랐던 지역이기에 이 땅에 살았던 우리의 선조들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자긍심이 높았을 것이고 나라와 백성에 대한 책임감도 강했을 것이다.

이러한 정신이 근세에 이르러 망국에 비분강개하여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긴 지사들을 배출하고 삼일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충청북도에서 가장 먼저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서게 한 원동력이 되었으리라.

이 땅 괴산은 전통을 중시하고 학문을 숭상하며 멸사봉공과 애국정신을 실천해 온 명예로운 고장이었다. 

문명은 순환하는 것이다. 정신이 세상을 지배한 역사가 수천 년이었다면 물질이 세상을 지배하는 역사는 삼백 년에도 미치지 못한다. 괴산은 산이 높고 골이 깊어 물질로 풍요를 얻기에는 불리하다. 자연환경이 그러한 곳에서 물질로 풍요를 구하고자 하니, 조건이 유리한 지역에 비해 사회적 갈등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지금의 안타까움을 타개할 해답을 우리 지역에 남아있는 문화유산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옛날에도 사람 사는 세상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인데 지금까지 남아 우리를 향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우리가 추구할 바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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