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음의 징표들
살아 있음의 징표들
  • 괴산타임즈
  • 승인 2020.11.04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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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남윤봉 교수.
남윤봉 교수.

살아 있다는 것은 생물의 영역에 관한 것이다.

무생물에는 삶과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생물에는 크게 두가지로 동물과 식물이 있다. 동물(動物)은 움직임을 특징으로 하고 식물(植物)은 그렇지 못함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므로 동물은 장소적 이동의 움직임이 활발할수록 그 살아 있음이 왕성함을 나타낸다. 그러나 식물은 동물처럼 장소적 이동이 인위적으로 자주 일어나면 왕성한 성장을 방해 받게 된다. 이것이 같은 생물이지만 동물과 식물의 기본적인 차이점이다.

그런데 움직임에도 크게 두 가지 형태의 움직임이 있다. 하나는 장소적 이동이고. 또 하나는 생물자체 내부에서의 움직임이다.

장소적 이동은 동물에 관한 움직임이다. 동물은 스스로 장소적 이동을 하고. 그 장소적 이동이 활발할수록 건강한 삶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래야 정상적인 살아 있음이 된다. 이에 더하여 동물자체 내부조직의 움직임이 활발해야 건강한 삶을 유지 할 수 있다.

즉 신체내부의 모든 세포조직이 정상적으로 움직이어야 한다. 이렇게 생물 중에서도 동물은 장소적 이동의 움직임과 신체 내부의 각 기관의 움직임이 있을 때에 건강히 살아 있다는 징표가 된다.

그러므로 동물에 있어서는 이 두 가지 움직임이 필요하지만 특히 신체 내부의 움직임이 정지되면 죽음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런데 식물에 있어서는 식물 스스로가 장소적 이동의 움직임은 할 수가 없다. 다만 식믈 내부의 움직임이 있을 뿐이다.

식물은 봄이 되면 잎을 피우고 성장을 시작하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다가 앙상한 가지로 추운 겨울을 지내며. 내부적인 움직임을 반복하면서 살아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식물이 잎이 나고 꽃이 피며 열매를 맺는 것은 살아 있음의 징표들이다.그러므로 봄이 되어도 새잎이 나오지 아니하면 그 식물은 죽었다고 말한다. 살아있음의 징표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동물이나 식물이나 그 자체 내부의 움직임은 생사(生死)를 나타내는 징표가 된다는 사실과 동물에 있어서는 장소적 이동의 움직임이 활발할수록 건강한 삶을 말해 주지만. 스스로 장소적 이동의 움직임이 불가능한 식물을 인위적으로 자주 장소적 이동의 움직임을 시행하면 식물의 본성에 맞지 않기 때문에 성장에 지장을 주거나 생명에 치명적 일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동물은 스스로 장소적 이동의 움직임이 많을수록 좋지만. 식물은 가급적 한 장소에 있게 하는 것이 좋다.

우리가 살아 있음에 관하여 관심을 많이 갖는 것은 사람의 살아 있음이다.

사람의 수명은 백년 남짓한데. 사람에 따라서는 각기 그 수명이 다르므로 일정한 연수를 말하기는 어렵다.

지금 우리의 평균수명은 80세 정도이다. 사람도 동물의 한 부류이므로 정신적인 면을 제외하면 큰 범주에서는 일반 동물의 살아있음의 내용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도 장소적 이동의 움직임이 활발하고 신체 내부의 각 기관의 움직임이 정상적이면 건강한 삶을 산다고 말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의 오장(五臟;간장(肝臟).심장(心臟).비장(脾臟).폐장(肺臟).신장(腎臟) )과 육부(六腑;담(膽).위(胃).대장(大腸).소장(小腸).삼초(三焦).방광(膀胱) )를 비롯해 모든 기관의 세포조직이 제대로 움직이어야 한다.

아마도 신체 내부의 모든 조직이 정상적으로 움직이면 자연히 장소적 이동의 움직임도 활발하게 될 것이다. 신체 내부의 움직임 중에서도 심장이 멈추고 호흡이 일정시간 이상 정지되면 죽었다고 말한다. 이것을 사망을 인정하는 “호흡맥박정지설”이라고 한다.

이처럼 사람의 호흡과 맥박이 정지되어 죽게 되면 사람은 인격이 소멸되어 물건으로 변한다. 이렇게 인격이 소멸되면 살아 있음의 징표인 움직임은 모두 정지되고 만다.

그런데 사람은 일반 동물과는 달리 육체적인 살아 있음 못지않게 소중한 것이 정신적인 살아 있음이다.

사람이 육체적인 살아 있음의 징표로 장소적 이동의 움직임과 신체 내부의 움직임이 있다 손치더라도 정신적인 살아 있음이 없다면 진정 살아 있다고 하기에는 미흡하다. 우선 정신적 활동이 정지되어 무의식상태가 되면 온전히 살아 있다고 하기에는 미흡해 보인다.

다음은 자존감이 상실된 상태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갖지 못하고 자신을 스스로 버리는 상태가 된다면 이 또한 정상적인 살아 있음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리고 자신의 살아 있음이 누구에게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이 역시 살아있다고 하기에는 모자라지 않나 여겨진다.

더하여 명백한 불의에도 무반응하거나 사리사욕으로 공익이나 국익을 해하는 정신적 소유자라면 진정 살아 있다고 하기에는 모자란다고 할 수 밖게 없겠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육체적 움직임을 바탕으로 정신적으로도 자존을 지키며. 누군가에는 의미가 있고.

또 함께 사는 데에 유익을 끼쳐야 진정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지금 우리가 살아 있음을 점검하면서 감사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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