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섬 대마도를 가다 41.
1245년부터 대마도를 다스리던 조선 출신인 종씨의 집안 역사를 기록한 종가문서(宗家文書)에 '부중진회도(府中溱繪圖)’가 있다.
이 그림에 부중의 선착장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종가문서는 대마역사민속자료관에 보관되어 있다.
부중(府中)은 이즈하라의 옛 이름을 말하고 ‘진(溱)’은 고어로 해수문(海水門), 즉 선착장이다.
조선통신사가 오갈 때 이 항구를 부중이라고 불렀다. 옛날부터 이곳에 대마도 인구의 절반이 모여 살았던 만큼 대마도의 심장부라 할 수 있다.
조선왕이 대마도주에게 관직을 내려주자 대마도주는 왜구에게 근거지를 제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경상도의 예속 도서가 되어 매년 정부로부터 곡물 받아갔다.
1672년 21대 도주 종의진(宗義眞)은 작은 배가 아소만과 대마도 동부를 왕래할 수 있도록 오후나고시(大船越)라는 운하를 만드는 큰 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종의진은 후추 번(부중) 3대 번주로 기록되고 있다.
이것은 에도 시대에 들어오면서 힘이 세어진 일본이 대마도후추번(對馬府中藩)을 강압 설치하고 도주인 종씨를 다이묘(大名)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대마도 도주 종의진을 대마부중 번주로 일본이 이중등록 시킨 것이다.
대마도 사람들은 조선과 일본의 양속(兩屬) 관계를 유지하다가 힘이 센 쪽에 붙어야 살아남는다고 생각하였다. 대마도의 양다리 걸치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일본에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면서 힘의 균형이 일본으로 급속히 기울었다. 일본은 1871년의 폐번치현(廢藩置縣) 정책으로 대마도 부중(府中)를 폐지하고, 이즈하라현을 만들었다.
그리고 연이어 1876년 대마도를 나가사키현으로 편입시키고 종씨 가문에게 일본 귀족의 작위를 부여하였다.
순식간에 대마도를 일본의 땅으로 만들어버리고 이제 독도까지 제 땅이라고 우기는 판이다. 그들의 폭력적 소유욕의 바탕에는 점진적인 치밀함이 내재 되어 있다.
일제는 우리나라의 국권을 유린하면서 제일 먼저 민족정기와 역사 말살 계획을 수립한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1910년 11월부터 1911년 11월까지 경찰을 동원하여 전국적으로 고서, 고화, 기록문 등을 샅샅이 수거하여 소각한다.
역사기록 장서 50여 종 20만 권이 연기로 사라졌다. 역사를 불태운 일제는 ‘조선사편찬위원회’를 만들어 한반도의 역사 자체를 날조하기 시작한다.
1923년 7월, ‘조선사편찬위원회’의 촉탁 구로이타 가쓰미는 대마도주의 저택 창고를 뒤져 고문서 66,469매, 고기록류 문서 3,576책, 고지도 34매 등을 소각시켰다.
대마도가 한국의 부속도서였다는 증거를 찾아 깡그리 불태운 것이다.
역사의 증거를 감추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 순간에도 대마도는 역사의 진실을 내보이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그 단서들을 놓치지 말고 찾아서 기록해야 한다.
대마역사민속자료관은 우리나라 선사시대 유물인 즐문토기, 무문토기, 청동기 등이 소장되어있는 박물관이다.
조선통신사 행렬의 그림, 신라의 불상, 고려의 불상이 자리한 가운데, 고려 시대의 초조대장경인 대반야경 600권이 특별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대마도의 지배자였던 종씨 일가의 문서가 약 8천 권 정도 보존되어 있다.
그 외에 대마도 야마네꼬(산고양이), 사슴, 물수리 등 천연기념물이 보관되어 있고 대마도의 고래잡이 기록이 고스란히 그림으로 제작되어 있어 옛 대마도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대마도는 이 문화재를 보관하기 위한 새 박물관을 짓고 있다.
민속자료관 일대에는 "조선통신사비", "고려문", "성신지교린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