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기 위해 살아야 한다(2)
먹기 위해 살아야 한다(2)
  • 괴산타임즈
  • 승인 2019.02.03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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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기 위해 사는 사람은 먹는 것에 집중할 수 밖에 없다.
박석준 흙살림 동일한의원 원장.
박석준 흙살림 동일한의원 원장.

이런 질문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먹기 위해 사는가, 아니면 살기 위해 먹는가?”

아마 먹는데 목숨 건 사람은 먹기 위해 산다고 할 것이지만 뒤따를 비난은 각오해야 한다. 그러니까 살이 쪘다는 둥, 굶주리고 헐벗은 동지를 생각하라는 둥...

그러나 나는 살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그런가? 
에피쿠로스는 이런 말을 했다.

욕망에는

1) 자연적이면서 필연적인 것이 있고 
2) 자연적이지만 필연적이지는 않은 것이 있고 
3) 자연적이지도 않고 필연적이지도 않은 것이 있다고. 

다소 복잡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예를 들어보면 간단하다.

에피쿠로스에게 쾌락은 고통을 없애는 것이다. 목이 마를 경우, 그것은 고통이다. 그 고통을 없애기 위해 물을 마신다.

물을 마셔서 목이 마른 고통을 없애려는 욕망은 자연적이면서 동시에 필연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쾌락이다.

그러나 배가 고파서 음식을 먹는 것은 자연적이면서 필연적인 욕망이지만 최고급 프랑스 요리를 먹으려는 욕망은, 배고픔을 없애기 위한 욕망이라는 점에서는 자연적이지만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꼭 그런 맛난 음식이 아니어도 배고픔은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적이지도 않고 필연적이지도 않은 욕망에는 돈과 명예와 권력 같은 것이 있다. 돈과 명예 같은 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욕망이 아니다.

돈을 예로 들어보면, ‘사람 나고 돈 났다’는 말처럼, 돈은 사람에게 식욕이나 성욕처럼 본래 타고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필연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자연적이면서 필연적으로 산다는 것은 기본적인 식욕과 성욕의 충족을 위해 사는 것이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것이다.

성욕이 일면 성욕을 충족시키는 일이다. 본능에 따라 그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살지만 목이 마르다고 프랑스에서 수입한 에비앙 샘물을 찾지 않고 배가 고프다고 고급 일식이나 이태리 음식을 찾지 않는 일이다.

너무 잘나서 남들이 함부로 접할 수 없는 사람을 성적으로 소유하지 않는 일이다. 너무 비싸서 남들이 가질 수 없는 그림을 혼자 갖지 않는 일이다.

완벽한 소리를 찾아 비싼 오디오를 탐하지 않는 일이다. 권력과 명예와 부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는 일이다.

자연적이고도 필연적으로 사는 일은 먹기 위해 사는 사람이 더 하기 쉽다. 먹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욕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권력이나 명예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먹기 위해 사는 사람이 잘못될 수도 있다. 그는 맛있는 것만 찾아다닐 가능성이 높다. 또 배가 불러도 더 먹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다. 배불러도 참는 것이다. 이는 자연적이지만 필연적이지는 않은 욕망이다.

이런 사람을 모욕 주기 위해 우리는 그런 사람을 ‘돼지’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제 돼지는 그렇지 않다. 돼지는 매우 깔끔한 동물이다. 먹는 것도 적게 먹는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위胃의 용량에 비해 개는 50% 정도를 먹고 돼지는 70% 정도를 먹고 사람은 120%를 먹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대체로 맞는 말일 것이다.

먹기 위해 사는 사람은 먹는 것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권력이나 명예나 부와 같은 자연적이지도 않고 필연적이지도 않은 욕구가 아니라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욕구에 충실하다.

그러나 먹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권력이 세도, 아무리 잘 생겨도 하루 세끼 이상 먹기 힘들다. 한 번에 먹는 양도 너무 많을 수 없다.

설혹 참고 먹었다고 해도 곧바로 몸에 탈이 난다(몸에 탈이 날까봐 먹고 일부러 토한 다음 또 먹는 사람이 있기는 하다). 

먹기 위해 살면서 그것이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음식이 어떻게 생산되는 지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누가 어떻게 생산한 것인지, 제철에 난 것인지, 한 마디로 자연과 올바른 관계를 갖고 생산된 음식인지 아닌지를 확인해야 한다.

유전자 조작된 종자를 대형 농장에서 키워 온갖 화학비료와 농약을 뒤집어쓰고 생산된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해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먹는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내게 오는지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제대로 셈을 치루지 않고 불평등한 과정을 통해 온 것인지, 심하면 남의 것을 빼앗아 온 것인 지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먹기 위해 사는 사람은 내가 먹는 음식이 내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 음식이 찬 것인지 더운 것인지, 오장육부 어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또한 재료끼리의 관계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궁합이 잘 맞는 것끼리 배합이 되었는지, 같이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 섞였는지 알아야 한다.

한 마디로 제대로 요리가 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공자는 제대로 요리된 음식이 아니면 먹지 않았다고 한다.

제대로 먹기 위해 살기 위해 살기 위해서는 음식이 자연과 맺는 관계, 사회와 맺는 관계, 내 몸과 맺는 관계, 음식끼리 맺는 관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그러한 모든 관계가 올바르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내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내 생각만 바뀌어서는 안 된다.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 앞에서 말한 모든 관계가 올바로 이루어질 수 있는 사회로 바꾸어야 한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먹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 의미는 바로 이런 것이다. 

돼지에 이어 온갖 몹쓸 누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개를 보자. 개는 온 몸을 통해 자신의 느낌을 표현한다. 개는 자신을 감추지 않고 또한 감추지도 못한다.

발정 난 상태와 번식을 위한 행위마저 감추지 못한다. 그렇지만 개는 직관적으로 삶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개는 악감정과 악의를 참지 못한다.

개는 살아 있음을 즐기고, 기꺼이 기뻐하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단순하게 충실하다(크리스토프 코흐, ‘의식’, 알마). 살기 위해 먹는다는 고상한 사람 중에 못된 짓을 보고도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은 아닐까.

아니 살기 위해 먹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닐까. 개야말로 진정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닐까. 개야말로 자연적이면서 필연적인 욕구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닐까.

살기 위해 먹는다면서 개돼지만도 못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만일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살기 위해 먹지 말고 먹기 위해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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