延中有弘(연풍에 김홍도가 있다) - 도화서 이야기(7)

이근우(중원대학교 상생교양학부 교수)

2020-05-07     괴산타임즈
이근우

도화서는 18세기 초경에야 지금의 을지로 입구 수하동(水下洞) 부근에 해당되는 남부 태평방(太平坊)에 관사를 마련하고 20세기 초의 대한제국기에 도화서가 폐지될 때까지 이곳을 사용했다.

태평방에 관서가 고착되는 숙종 대 후반 경을 전후하여 도화서도 다시 활성화되며 조선 후기의 화려한 부흥기가 열리기 시작했다.

태평방, 현재의 을지로 입구 4번 출입구 뒤쪽에 2002년 12월 서울특별시에서 설치한 도화서 터 표석이 있다.

수하동 동명은 남산에서 발원한 창동천(倉洞川)이 흘러가는 물 아래쪽에 마을인 데서 유래되었으며 물아랫골 또는 보습곳이라고도 불렀다.

수하동은 조선 초기 한성부 남부 대평방에 속하였으며, 영조 27년(1751)에 간행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는 남부 대평방 보십내계・보십외계・수하동계로 되었다.

갑오개혁 때에는 한성부 남서(南署) 대평방 수하동계 수하동, 보십계 상리동・하리동, 석동계 석동으로 되었다.

그 뒤 1914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 획정에 따라 경기도 고시 제7호에 의해 상리동・하리동・석동・수하동 각 일부를 합쳐 경성부 수하정이 되었으며,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로 구제도(區制度)가 실시되면서 중구 수하정이 되었다.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 수하동으로 하였다. 1975년 10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 제981호에 의해 태평로1가 동사무소 관할 아래에 두어 오늘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