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백제식 산성, 가네타에 오르다

'대마도는 본시 우리 땅이다' 작가, 이석우 시인의 우리 역사문화 답사기 눈물의 섬 대마도를 가다 ②.

2019-05-05     괴산타임즈
이석우

필자가 대마도의 가네타 산성을 찾았을 때는 한여름이었다. 편백나무가 푸른 하늘과 어우러진 산길에서 이방인을 막아서며 반기는 것은 눈동자가 해맑은 고라니였다.

숲속에서 “푸드득” 고려궝이 날아올랐다. 그 날갯짓에 한반도에 대한 그리움과 향기가 펴 오른다. 이 성이 자리 잡은 흑뢰산은 이들의 눈동자와 날갯짓을 품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이소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찌하여 이곳에 백제식 산성이 자리하고 있을까.

바다를 통하여 한반도와 굳게 끌어 앉고 있는 역사와 지질학적인 숙명적 연대에 대한 호기심은 여름 바다를 더 깊고 푸르게 만들고 있었다.

백제는 테뫼식산성과 포곡식산성을 주로 쌓았다. 테뫼식은 산꼭대기 7~8부 능선에 테두리를 돌린 것같이 쌓은 것으로 흡사 여인네가 물동이를 머리에 올리기 위해 수건으로 똬리를 틀어 얹은 모습을 닮았다. 포곡식은 산성이 계곡을 품고 있을 때를 말한다.

대전의 보문산성과 계족산성은 테뫼식이고 공주의 공산성과 청주의 상당산성은 포곡식이다. 특히 청주의 상당산성의 경우는 소형 방죽을 만들어 병사와 민간인의 장기 주둔에 대비한 예이다.

테뫼식 산성도 지대가 낮은 곳은 흙을 주재료로 하지만 지대가 높은 곳은 돌만 가지고 쌓으며 밑에 흙으로 기초를 다지고 돌로 마무리하는 혼합방식도 있다. 천안의 동성산성은 정상부의 경사면을 단단한 암반이 드러날 때까지 판 뒤 그 위에 점성이 강한 흙을 다져 성벽을 쌓아 토루(土壘)까지 만들었다.

대마도의 가네타성(금전산성)은 동쪽과 북쪽은 높은 절벽이 자연스럽게 적을 침입을 방어해준다. 그래서 남쪽과 서쪽에 주로 성을 쌓았다. 가네타성의 남쪽 부분은 이렇게 흙으로 기초를 하고 토루(土壘) 대신 석루(石壘)로 완성한 것이다. 남서부는 주로 돌을 얼기설기 엇 놓아 석루를 만들었다. 현재의 석루는 명치시대에 많이 고쳐서 원형이 다소 왜곡되었다.
 
충북 증평군 미암리와 도안면 노암리 경계에 위치한 이성산성은 이 테뫼식의 외곽에 포곡식을 겹으로 설계한 혼합식 산성이다. 정상부와 남쪽 봉우리에 흙을 다져가며 쌓고 그 외곽을 포곡식으로 연결한 전형적인 백제 산성구축 방식이다. 가네타성도 이런 백제의 혼합식 산성과 유사한 부분이 많이 발견된다.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백제가 무너지고 의자왕은 당나라로 잡혀간다. 규슈지방의 구주백제 부여풍장은 백제대왕으로 임명되어 왜국(倭國)에서 건조된 420척의 선박으로 2만 7천의 왜와 연합한 백제 중흥군을 이끌고 한강의 어귀 백촌강으로 출전하게 된다.

당나라 군선은 170척에 불과하였으나 네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모두 패하고 만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전선이 불타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덮고 바닷물이 피로 붉어졌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한다.

일본서기는 663년 백강 전투가 패배로 끝남으로써 비로소 백제 멸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의 주유성이 항복했다. 일을 어떻게 할 수 없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찌 또 갈 수가 있겠는가?”

왜국은 조상이 묻힌 백제의 멸망을 슬퍼한다. 조상 분묘가 있는 백제 땅을 밟을 수 없음을 한탄하며 백제 유민과 힘을 합하여 667년 나당연합군의 침임을 대비한 가네타성을 완성한다.

테뫼식
산성
가네타
대마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