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사기획] 괴산 화양구곡(華陽九曲)과 만동묘(萬東廟)
[탐사기획] 괴산 화양구곡(華陽九曲)과 만동묘(萬東廟)
  • 괴산타임즈
  • 승인 2018.09.24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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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취재= 괴산타임즈 노원래 기자·충북넷 오홍지 기자
만동묘=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명나라 신종(神宗)을 제사지내기 위해, 1704년(숙종 30) 충북 괴산군 청천면(靑川面) 화양동(華陽洞)에 지은 사당. /글·네이버 지식백과, 사진·노원래 기자

[글·충북넷 오홍지 기자] 괴산에는 7개의 신비한 구곡이 있다. 구곡들은 보면 볼수록 신비감을 감돌게 한다. 이어지는 황홀감에 가슴은 충만해지고, 기분은 최고조에 도달해 무아지경에 빠져들게 한다. 황홀감과 동시에 정신 마저 몽롱해진다. 무엇을 기대한 걸까. 신선이 살았다는 구곡이어서? 산은 그저 산이고, 물은 그저 물일 뿐인데, 그뿐인데도 공기를 크게 한껏 들이마신 것처럼 가슴이 벅차 오른다. 그렇게 넋을 잃은 감각기관은 무더위가 절정에 달아오른 8월, 대지에 내리쬐는 태양 빛의 뜨거움을 압도하는 순간의 감동으로 다가온다. 괴산타임즈와 충북넷은 괴산의 정취가 살아 숨 쉬는 7개 구곡에 대해 집중 탐사·연재하려 한다.

 

화양구곡(華陽九曲)과 만동묘(萬東廟)

 

화양구곡은 속리산국립공원이라 하면 속리산 주변만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속리산국립공원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어서 막상 속리산 덩이는 맨 남쪽 보은땅에 치우쳐 있다. 국립공원의 허리께는 경상북도 상주시이며 가장 북쪽은 괴산군에 속한다.

괴산땅에 드는 속리산국립공원에서 칠칠한 숲과 멋진 바위들, 그 위로 번져 흐르는 맑은 물줄기가 좋은 계곡을 이룬 곳이 장연면 율지리(현-칠성면 쌍곡리)의 쌍곡계곡과 청천면 화양리의 화양동계곡이다.

그중 화양동계곡은 경치나 계곡의 규모에서, 또 조선 중기의 거유(巨儒) 송시열과의 인연으로 하여 충북도에서 으뜸가는 명승지로 꼽힌다.

화양동계곡은 화양천 맑은 물을 끼고 산 속으로 10리쯤 뻗어 있다. 옛사람들은 이 골짜기를 ‘금강산 남쪽에서 으뜸가는 산수’라 일컬었다.

훤칠하고 깨끗한 바위들은 벽으로 치솟거나 너럭바위로 가로누웠고, 옥 같은 물은 그 위로 미끄러진다. 양쪽 산기슭의 소나무들은 층층이 붉은 줄기를 드러내고 싱싱하게도 자랐다. /네이버 지식백과

만동묘 전경. /사진·노원래 기자
만동묘정비. /사진·노원래 기자.
만동묘비석. /사진·노원래 기자.

만동묘는 인조 때 청나라를 다녀온 민정중이 구해온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는 글씨 한 폭을 송시열(宋時烈)에게 전해주자 이글을 보고 의종이야 말로 예(禮)를 지켜낸 최고의 군주로 칭송하였다.

존명 사대주의 사상에 열렬했던 송시열은 이를 받고서 이 글을 화양동 석벽(石壁)에 새겨 놓고 석벽 위에 공부하는 사당을 지었는데, 송시열이 죽을 때 그의 제자 권상하(權尙夏)에게 이곳에 묘우(廟宇)를 지어 신종과 의종을 제사지내도록 하여 권상하가 유림을 동원하여 지은 것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 묘에 딸린 전토(田土)와 노비를 주었고, 영조 때에는 묘를 중수하였으며 면세전(免稅田) 20결(結)을 주었다.

1809년(순조 9)에는 묘우를 개축하고 1844년(헌종 10)에는 정식으로 봄과 가을에 한 번씩 관찰사가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이 묘는 노론(老論)의 소굴이 되어 상소와 비판을 일삼았고, 비용을 염출하기 위해 양민을 토색하는 등 민폐가 심하여,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헐어버리고 신주와 편액(扁額) 등은 서울 대보단(大報壇)의 경봉각(敬奉閣)으로 옮겼다.

대원군이 실각한 후 1874년(고종 11) 다시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도 유생들이 모여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므로 총독부가 강제로 철거하였다.

조선시대 후기 도산서원 등과 더불어 4대 서원으로 유명하였으나, 노론(老論)세력의 본산으로 화양서원이 행한 병폐가 극심했다.

지금은 복구되어 있고 만동묘정비가 지방기념물 25호로 지정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 화양 제1곡 경천벽(擎天壁)

근처에 넓은 주차장 옆으로 흐르는 화양천 건너편에 높이 치솟은 바위벽이 그것이다. 치솟은 바위가 하늘을 떠받들듯 하였다고 경천벽이며 아래쪽에 華陽洞門(화양동문)이라 쓴 송시열의 글씨가 큼직하게 새겨져 있다. /글·네이버 지식백과, 사진·노원래 기자

■ 화양 제2곡 운영담(雲影潭)

거울처럼 맑은 물에 지나던 구름이 제 모습을 비춘다는 운영담(雲影潭)은 빠르게 흘러온 계곡물은 여기 고여 잠시 숨을 가다듬고 다시 흘러간다. 경천에서 약 400m 북쪽의 계곡에 맑은 물이 모여 소를 이루고 있다. /글·네이버 지식백과, 사진·노원래 기자

■ 화양 제3곡 읍궁암(泣弓岩)

계곡을 향해 퍼져 누운 너부죽한 바윗덩이다. 송시열은 돌아간 효종 임금을 기리며 매일 새벽 제삿날에 이 바위에 올라 서울 쪽을 향해 엎드려 통곡했다고 한다. /글·네이버 지식백과, 사진·노원래 기자

■ 화양 제4곡 금사담(金沙潭)

화양구곡 가운데서도 다시 손꼽히는 승경이다. 계곡에 가득, 미끈하게 잘생긴 바위들이 눕고 서고 앉았다. 맑은 물은 그 사이로 흐르며 제법 시퍼렇게 깊어지기도 하고 폭포처럼 허옇게 물방울을 튕기기도 한다. /글·네이버 지식백과, 사진·충북넷 오홍지 기자

■ 화양 제5곡 첨성대(瞻星臺)

물줄기를 따라 조금 더 거슬러 오르면 화양3교라 이름붙은 다리가 계곡을 가로지른다. 다리 바로 위쪽에 각진 바위가 층층이 쌓여 높직한 대를 이룬 것이 제5곡이다. 별 보기 좋은 곳이라는 뜻일까. /글·네이버 지식백과, 사진·충북넷 오홍지 기자

■ 화양 제6곡 능운대(凌雲臺)

6곡은 큰 바위가 마치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듯 우뚝하다고 해서 능운대라고 불리운다. 근래에 생긴 판판한 포장길이 능운대와 계곡 물가를 갈라놓은 탓에 그 이름에 걸맞는 우뚝함이나 끼끗함을 잃었다. /글·네이버 지식백과, 사진·노원래 기자

■ 화양 제7곡 와룡암(臥龍岩)

비스듬히 계곡을 질러 뻗은 바위가 용이 굼실거리는 듯하여 와룡암인데 한쪽 가장자리가 길 밑으로 들어간 것이 아쉽다. 길게 누운 바위 위에 솥바닥 같은 둥근 구멍들이 파였다. /글·네이버 지식백과, 사진·노원래 기자

■ 화양 제8곡 학소대(鶴巢臺)

학소대는 7곡과 제법 거리가 있다. 와룡암 동쪽으로 지나면 학소대이다. 바위산 위에 낙낙장송이 오랜 성상의 옛일을 간직한채 여기저기서 있는데, 옛날에는 백학이 이곳에 집을 짓고 새끼를 쳤다 하여 이름을 학소대라 했다. /글·네이버 지식백과, 사진·노원래 기자

■ 화양 제9곡 파천(巴串)

개울 복판에 흰 바위가 펼쳐 있으니 티 없는 옥반과 같아서 산수경관을 찾아 이곳에 오는 관광객은 누구나 이 넓은 반석 위에 거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글·네이버 지식백과, 사진·노원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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