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저며 오는 그리움, “살아 있다면 만나고 싶어요”
[기고] 저며 오는 그리움, “살아 있다면 만나고 싶어요”
  • 괴산타임즈
  • 승인 2018.09.12 0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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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래 괴산타임즈 대표
괴산타임즈 노원래 대표.

눈물의 만남, 2015년 이후, 이루어지는 이산가족 상봉을 보며…….

살아 있다면 만나고 싶어요. 이 말은 20여 년 전 통일부에 이산가족상봉 신청을 한 후, 통일부에서 DNA 검사와 동영상 촬영을 하러 왔을 때 내 어머니께서 동영상 팀에게 남긴 말이다.

작고 고운 내 어머니.... 결혼 생활 5년 어쩌면 꿈만 같던 그 5년 세월에 세 살 위 누님 과 나를 낳으신 어머니께서 눈물을 지으시며 해 주신 말이다.

요즘이 아닌 70여년전 그 무슨 애틋한 부부의 정과 사랑이 있었을까?

그 어머니가 만나고 싶으세요. 하고 물으니 먼저 눈물을 흘리시며 “살아있다면 만나고 싶어요” 한다.

왜 만나고 싶으세요? 하고 물으니 망설임 없이 나오는 대답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느냐고 물어보고 싶다고 한다. 지금 내 어머니 나이가 93세(촬영당시88세)이니 내 아버지는 한 살 위 94세이다.

지금도 어쩌다 그때 일을 여쭈어 보면 내 어머니는 그때일은 이제 희미해져 있다면서 눈물부터 흘리신다.

늘 아버지 없이 누나와 나를 어렵게 키우신 것이 마음이 아프다며 눈물을 보이신다.

“이산가족 상봉“

아마도 이 단어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만이 쓸 수 있는 말이 아닐까? 

6.25 내가 1살 되던 그해 6.25전쟁이 났다. 그렇게 나는 70년을 아버지 얼굴을 기억 하지 못하고 평생 아버지라는 말을 해보지 못한 채 살고 있다. 6.25전쟁으로 인한 민족의 비극이 어찌 나 혼자만의 슬픔일까? 이산가족상봉을 신청한지 20여년이 흘렀다. 신청자 연령순으로 선정한다하여 어머님 이름으로 신청을 하였으나 지금껏 연락은 없다. 아마도 내 아버지가 북한에 살아있지 않아서 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이산가족상봉을 할 때마다 한 번도 본적 없는 내 아버지가 한없이 보고싶은건 왜 일까? 내가 어릴 적 할아버지께서 내게 해주신 말씀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네 아버지는 2년 후면 집에 온다고, 또 3년 후면 집에 온다고 말씀 하셨다. 그때는 2년이라는 3년이라는 개념을 모르고 있던 나는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이야기 했던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가 4대 독자였기에 아버지 형제는 11남매였다 고한다. 그중 내 아버지는 장남으로 납북되시기 전 결혼 5년차였으며 세 살 터울의 누나와 내가 태어난 상태이다. 중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는 나의 첫 돌날 외가로 나를 보러 오신 후 소식이 없다고 했다. 한참이 흘러 아버지 바로 아래 작은아버지가 집에 오셔서 하는 말씀이 서울 중앙청에서 형과 함께 붙잡혀 있다가 아버지가 동생은 집으로 보내 부모님을 모시게 해달라고 부탁하여 가족들은 아버지가 납북 되신 것을 그렇게 알게 됐다고 한다.

이산가족 상봉은 대한적십자사가 1971년 6.25 전쟁과 남북분단으로 헤어진 이산가족의 실태를 확인하고자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KBS 방송과 시작하였다. 1973년 6.23선언을 하였으나 북한과 교류 단절 상태는 호전되지 못하였다.1984년 남한 수해에 대해 북한에서 구호물자 제공 제의 이후 급물살을 타고, 1985년에 가서야 서울과 평양 간 고향방문단과 예술 공연 행사가 이루어졌다. 이 고향방문단은 남북 합쳐 100명의 이산가족을 만나게 한 행사로 이 중에서 65명이 상봉에 성공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남북 이산가족 상봉의 역사의 최초라고 할 수 있다.

1996년과 1998년에 일어난 무장공비 침투사건 및 잠수함 침투사건과 1999년 1차 연평해전 등으로 남북한의 관계가 악화되어 긴장상태에 있었다가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이산가족 상봉 합의가 이루어짐에 따라 그해 8월 15일 광복절에 제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이산가족 상봉은 김대중 정부시절에 시작되어 노무현 정부까지 순조롭게 이어져 그 당시까지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가족과 재회하는 기쁨을 나누었다.

2008년 이명박 정부의 출범 때 북한의 핵 개발 재개로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금강산에서 박왕자 씨 피살사건으로 이산가족 상봉이 이때부터 끊어지게 되었다가 2009년 추석 때 어렵게 이루어졌으나 2010년 3월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남북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달은 이후로 상봉 논의나 실행은 없었다. 그 와중에도 상봉논의가 있었지만 북한이 천안함 피격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계속 미루어졌다. 2010년 10월 어렵게 이산가족 상봉이 성사되어 일부 이산가족들이 가족과 재회하였으나 11월 연평도 포격 사태가 발발하면서 결국 이산가족 상봉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이산가족의 연령이 대부분 80대나 90대 최대는 100세 이상 최고령의 노인들이라 앞날을 보장할 수 없는 입장이기도 하여서 이들이 생전에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알 수가 없다.

다시 만날 수 있다고 해도 최고령인 1세대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게 됨에 따라 이제는 2세대나 3세대들을 통해서나 만나야 하겠지만 이들 중 일부는 이산가족의 존재조차 아는 이들도 없거나 드문 편이기도 하다. 특히 1세대의 자녀나 손 자녀 세대인 2세대, 3세대들은 분단과 전쟁을 직접 겪었던 1세대들과는 달리 전쟁 경험도 없고 헤어진 가족이 누군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1세대들에 비해서 이산가족 상봉을 한다고 해도 서로 모르거나 어색해하는 경우도 있다. 

이점을 우리는 관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만, 북한에서 남한의 이산가족을 찾아 상봉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북한 내에서 당 간부나 행정관료 등과 같은 권력층들이다. 애초에 북한에서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정보 유통이 제한적이고, 복잡한 행정 절차를 따라야 하기에 특권층 이외에는 남측의 이산가족을 상봉할 생각조차 못한다고 한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에서 서명된 판문점 선언 후 이번 8월 15일을 기념하여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하여, 2018년 6월 남북 적십자회담에서 광복절에 이산가족 상봉을 하게 된 것으로 안다.2018년 8월 20일~26일 이산가족 상봉이 금강산 관광구역.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및 적십자회담 합의 후 2014년 이후 4년 만에 열리는 이산가족상봉이다.

안타깝게도 2015년 9월 기준으로 지난 15년 동안 이산가족이 하루 평균 12명꼴로 사망했다는 통계가 나오고 있다.

세월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 현재 통일부에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한 사람이 5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지금처럼 한다면 5만 이산가족 신청자들을 어느 세월에 이산가족의 한을 풀 수 있을까? 

지금 90인 사람이 100년을 더 살아도 이산가족 상봉을 다 마칠 수가 없다고 한다. 어차피 이산가족상봉을 할거라면 1년에 상봉 횟수를 늘리고 인원도 더 많은 인원이 상봉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나야 할 사람들의 나이가 너무 많으니까? 세월은 또 그렇게 흘러가니까?

70년의 한을 하루 이틀 만남으로 풀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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