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낙선재의 마지막 여인들
[기획연재] 낙선재의 마지막 여인들
  • 괴산타임즈
  • 승인 2021.03.27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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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작가
'대마도는 본시 우리 땅이다' 시리즈
눈물의 섬 대마도를 가다 50.
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덕혜옹주는 조선 제26대 고종황제와 궁녀 사이에서 태어난 귀하고 귀한 외동딸이었다. 고종이 고명딸이라며 애지중지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조선 총독부는 그녀가 서녀라는 이유를 들어 왕족으로 인정하지 않다가 6살이 되자, 겨우 황적(皇籍)에 입적시킨다.

서녀의 소생이라 옹주(翁主)가 되었고 호를 덕혜(德惠) 정하게 되니, 조선인들은 그녀를 ‘이덕혜 옹주’로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행복은 소나기 뒤편의 무지개처럼 잠시 그려졌다가 사라지고 말았다.

1955년 6월 종무지와 이혼하면서 양덕혜가 된 후, 그의 이름은 세상에서 깡그리 지워지고 말았다. 가을이 되자 딸 정혜를 결혼시킨 종무지는 자신도 재혼하였다.

해가 바뀌자 딸 정혜는 이혼 후 행방불명이 되어 버렸다. 이혼하면서 일본의 병원에 남아 있던 덕혜옹주는 1962년 1월 26일, 38년 만에 귀국한다. 어찌 된 일인지 그 후 20년이 지나서야 이 성씨로 호적에 입적된다.

양덕혜로 산지 27년 만에 본래의 성씨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녀의 기억은 종잇장보다 더 희미하게 엷어져 있어 그녀 되찾은 성과 이름에 대한 기쁨은 그곳에 없었다.

고종은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인(이방자 여사)과 혼인하게 된 왕세자 이은 때문에 늘 가슴이 저려 왔다. 어린 딸 덕혜는 그 전철을 밟게 하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1919년 1월 21일 독살당함으로써 그 다짐은 소망의 문을 닫고 말았다. 
고종의 죽음으로 덕혜옹주의 일본 강제 유학의 걸림돌은 모두 제거되었다.

1925년 소학교 5학년, 열세 살이 되자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해야 한다. )'는 일제의 요구에 따라 강제 유학길에 올라, 이덕혜라는 이름으로 일본 여자학습원 2학년에 편입된 것은 그해 4월이었다.

이 추방 유학을 추진한 자는 “대마도의 이완용 친필 매국비”의 주인공인 “국분삼태랑”이었다. 그 당시 그는 이왕직 차관이었다.

그는 영친왕의 전철대로 프로그램을 작동하고 있었다. 일본에 도착하자 올케 이방자 여사가 마중 나와 있었다.

이 순간 두 여인의 험난한 운명은 반려자로 예약되었을 것이리라.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이 이방자 여사와 정략적으로 혼약이 이루어진 것은 1916년 8월 4일이었다. 덕혜옹주 4살 때의 일이다.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英親王) 이은을 이토 히로부미에게 끌려가게 뒤에서 도운 자는 이완용이었다.

당시 백작이었던 이완용은 「도쿄일일신문」에 1916년 8월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한다. “ ··· 조선에 있어서 더없이 경사스런 일이다. 이는 세자 저하의 학문, 그 외 뛰어난 점에 관해서는, 천황을 시작으로 각 황족에게 인정받고 있다.

결과적으로 데라우치 조선 총독이 알선을 위해 수고한 점을 감사해야 한다. 이왕가는 말할 필요도 없이, 일반 조선인에게 있어서 매우 큰 기쁨이다.”

이완용이 3·1 독립운동 후, 강압적인 국정에 임하자, 일제는 그를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급시킨다. 분노한 백성들은 이완용 집을 불 질러버렸다. 이완용은 화상을 입었다.

조선 귀족을 당초에 76명이 선출하였다. 그 중에 박가진(朴嘉鎭) 같은 분은 작위를 헌 집신 버리듯 팽개치고 상하이로 달려가 독립운동으로 몸을 불태운 이도 있다.

황태자 이은은 중장까지 올랐으나 패전 뒤에 일제는 그의 군복을 벗기고, 1947년 일본의 헌법이 시행되면서 왕족의 지위와 국적을 박탈하였다. 1963년 11월 22일 귀국하여 낙선제에서 이방자 여사와 거처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한 해 먼저 돌아와 서울대학 병원에 입원했던, 덕혜옹주는 1967년 퇴원하여 낙선제로 돌아온다. 다음 해에 수강재로 옮겼다가 1970년 영친왕 이은이 서거하자 낙선재로 다시 1972년 종무지가 창덕궁 수강재를 찾아왔지만 이씨 종친은 면담을 허락하지 않는 냉담함을 보였다.

덕혜옹주에 대한 슬픈 애정 때문이었다. 이즈하라 가네이시성(金石城) 유적지에는 덕혜옹주가 대마도 도주 다케유키(宗武志)의 결혼을 기념하는 이왕가종가백작어결혼봉축개념비(李王家宗家伯爵御結婚奉祝記念碑)가 세워져 있다.

덕혜옹주는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낙선재에서 1989년 4월 21일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영원 반려자 이방자 여사는 열흘을 더 살지 못하고 4월 30일 89세 나이로 별세하였다. 그들은 지상에서 가장 슬픈 운명을 만났으나, 가장 아름다운 반려자를 만나 세월을 보내다가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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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_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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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덕혜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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