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19대 도주 종의지 일본에게도 손내밀다
[기획연재] 19대 도주 종의지 일본에게도 손내밀다
  • 괴산타임즈
  • 승인 2021.01.28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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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는 본시 우리 땅이다' 작가, 이석우 시인의 우리 역사문화 답사기
눈물의 섬 대마도를 가다 47.
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만송원(万松院, 반쇼인)은 대마도역대 번주인 소(宗)家의 묘소이다. 원래는 송음사(松音寺)라고 불렀다가 종의지의 법명인 만송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소 요시토시를 긴세끼죠(金石城) 뒷산에 묘를 쓰고 명복을 빌기 위해 절을 지은 것이다. 수령이 천년 넘은 삼나무가 묘역에 신비감을 준다. 이끼 낀 묘비들, 햐쿠칸기(百眼木)라 불리는 긴 돌계단이 매우 인상적이다.

소 요시토시는 11살에 대마도 제19대 도주가 되었다. 그에게는 원래 종교가 없었는데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가 가톨릭을 권하는 바람에 나중에 세례명까지 받은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그가 이혼해버린 아내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훗날 신부가 되었으니 그의 신앙심 정도를 가늠해 볼 수도 있다.

종의지는 조선 조정에서 내려준 예조 참의 격의 벼슬을 받고 있었다. 그가 장사를 통해 조선에서 얻어내는 수입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의 수완은 신출귀몰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도 손을 내밀어 대마도 영지를 스스럼없이 인정받았다. 대마도를 가져다 바치고 다시 환토(還土) 받아 도주로 인명 받은 셈이었다.

그런데 난처한 일이 벌어졌다. 수길이 조선의 굴신을 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조선에서 얻어내는 수익이 얼마인데, 아차 하는 순간에 대마도가 쑥대밭으로 변해버릴 위기가 온 것이다. 그는 일본과 조선을 오가며 줄타기 협상을 시작한다. 1588년 잠시 도주 자리를 넘겨받았던 소 요시시게 죽자, 다시 도주에 오른 종의지의 맹활약이 시작된다. 그는 촛불을 켜 들고 바다를 건너려고 덤벼들었다.

1590년 그 유명한 황윤길, 김성일 조선 사절단을 복속사절(服屬使節)로 둘러대며 수길을 알현하게 한다. 종의지가 만들어낸, 수길의 전국통일을 축하는 사절단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수길은 조선이 명나라 정복의 앞잡이 노릇을 요청하니 조선이 이 요구를 받을 리 만무하였다.

궁지에 몰린 소 요시토시는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려 하니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는 거짓 요청을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실현되지는 않았다. 조선과 일본의 관계사 중에서 유례를 찾기 쉽지 않은 사기극을 연출하고 있었다.

1592년 음력 4월 12일 협상을 실패한 종의지는 장인인 소서행장의 부장으로서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쓰시마 섬북단의 오우라(大浦)를 출항해 조선을 침략하였다. 임란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종의지는 장인과 더불어 명나라와 평화협상에 참여하였다. 황당하게도 그들은 명나라 황녀를 천황의 후궁으로 들이고 조선 8도 중의 절반을 내놓으라는 풍신수길의 요구조건을 풀어 놓았다.

불화살을 맞은 명나라 심유경은 수길을 왜왕에 봉한다는 거짓 보고하게 되었다. 종의지도 국서를 수정하는 등의 기만행위를 일삼지만 끝내 교섭의 불씨는 꺼지고 말았다.

수길이 죽고 임진왜란이 막을 내렸다. 덕천가강에 의해 풍신수길 옹호파는 몰살 당하였다. 종의지의 장인인 소서행장도 참수형을 당하였다. 종의지는 가시 속옷을 입고 있는 심정을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소서행장의 딸인 아내 마리아와 이혼해버렸다. 문풍지처럼 떨리던 가슴이 조금 진정되는 듯하였다.

덕천가강이 종의지를 불러 세웠다. 목숨이 파도 위의 물거품보다 못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사면은 물론 대마번(對馬藩)의 초대 번주 자리를 덥석 던져주는 것이었다. 영지도 고스란히 보전되었다.

종의지는 소서행장의 딸을 버리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었다. 추측의 일반적인 특성은 빗나가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종의지에게 덕천막부(德川幕府)가 조일 국교 수립의 책무를 떨어뜨린 것이다. 아내를 헌신짝처럼 버리지 않았어도 그의 목숨은 붙어 있었을 텐데…

종의지는 조선 정부에게 통신사 파견을 수락받아 제1차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의 파견을 성사시켰다. 1609년에는 조일 간 기유약조(己酉約條)의 체결하여 조선 관계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 덕분에 그는 조선과의 독점적인 교역권을 허가받게 되었다.

그는 1615년 1월 3일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종의지가 사망하자 조선의 광해군은 1622년에 도서를 지급하고 만송원송사(萬松院送使)의 파견을 허가하여 조의를 표하였다. 조선정부는 종의지의 제사와 만송원의 운영비용을 도와주었다. 만송원은 종의지의 법명이자, 보리사의 명칭이다.

1647년에 산기슭인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가람과 탑 등을 재정비하여 이후 대마도주인 종씨의 원당이 되었다. 원래 대마도 도주, 대마도 태수였으니. ‘대마 번주’라고 하면 안 된다.

이 정문은 창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햐쿠칸기(百眼木) 132계의 돌계단이 고풍스런 느낌을 감돌게 한다.
삼족구는 광해군 즉위 후 하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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