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신라신사(新羅紳士) 이야기
[기획연재] 신라신사(新羅紳士) 이야기
  • 괴산타임즈
  • 승인 2020.10.10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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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는 본시 우리 땅이다' 작가, 이석우 시인의 우리 역사문화 답사기
눈물의 섬 대마도를 가다 39.
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대마도에 신라신사가 있다. 그런데 대마시는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다. 풀도 깎지 않는다. 순수한 민간신앙이 흘러가 형성된 종교문화일진데 그 발원지가 한국이라고 밝히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일까.

대마도시는 이 신라신사를 잘 관리하지 않는다. 황백현 박사가 제초를 하는 장면이 공개된 적도 있다.

대마도 한국전망대 위에 있는 김비라신사(金比羅紳士)는 풍어를 비는 신사이다, 그런데 이 신사를 한국관관객은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안내판이 없는 데다가 나무숲이 무성한 언덕에 있어 잘 안 보이는 때문이다.

고구려는 고구리, 백제는 구다라, 신라는 시라기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 일본어 발음이다. 그러나 신라신사를 그대로 ‘신라진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신라신사에는 한반도에서 도래(渡來)한 신들을 주로 안치하는데 ‘우두천왕(牛頭天王) 또는 ’신라국명신(新羅國明神) 등이 바로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신들이다. 지금도 신사의 궁사들은 흰옷을 입는데 이것은 신라의 목화실로 짠 것이다.

대마도는 신라의 앞바다이다. 신라인 일본으로 건너간 발자취마다 신사가 서게 되는데, 첫발자국에 선 것이 신라신의 와다쓰미신사(海神神社)이고 다음이 오사카의 스미요시신사라고 할 수 있다.

오사카에서 시코쿠로 가는 길목의 가파른 언덕에는 신라신사가 있다. 어촌 주민들은 매년 10월 10일에 모여 가을 풍어제를 여는데, 높은 언덕에 자리 잡은 이 신라신사는 일종의 등대신사라 할 수 있다.

항해의 안전을 지켜주는 신라대명신을 모시고 언덕 위에서 등대처럼 밟은 신불빛을 바다에 뿌려주려고 세운 것이다. 일본인들은 그 옛날 일본에 고대문화를 전파한 신라인들을 성스럽게 여겨 신라대명신을 섬기기 시작한 것이다.

신라나 당나라로 향하는 뱃길뿐만 아니라 일본의 주요 항로 언덕에서 뱃길의 안전을 지켜줄 것을 믿으며 제사지내는 것이다.

오사카 앞바다를 지키는 해신인 스미요시대신 또한 신라신이다. 이것이 대마도의 풍어와 안전을 기원하는 신사 김비라신사(金比羅紳士)에 안내판이 없는 이유가 될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집안에 일이 있으면 신사에 간다. 아들이 태어나면 32일째, 딸이 태어나면 33일째 되는 날 신사로 달려가 소원을 빈다. 여행, 이사, 건축 등 뜻있는 일을 할 때면 신사에 가서 축사한다. 일본 전국에 우리나라 왕을 모시는 신사도 2천 개가 되고 바다를 지켜준다는 신을 모신 스미요시(신라신사) 만해도 2천 개가 넘는다. 심지어 사슴, 여우, 뱀, 돼지 등도 신사에 모신다.

일본인들이 산이나 사람이나 동물에게 경건한 마음으로 소원을 비는 것은 마치 옛날 우리나라의 서낭당에서 소원을 빌던 민간신앙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일본인 신사는 삶속에 살아 숨 쉬는 전통적인 종교문화다.

그런데 일본의 정치가들은 이 민간신앙을 왜곡하기 시작한다. 메이지(明治)유신 때부터 민간신앙에다 국가 종교를 덧씌워서 신사를 역대 천황과 순국열사 참배공간으로 바꾼 것이다.

처음에는 1869년 메이지 유신정권을 만들다 죽은 사람들을 기원하기 위해 쇼콘샤(招魂社)를 지어 운영하였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을 치루면서 전사자들이 많이 생기자 이곳에 모두 안치한다. 1978년에는 태평양 침략전쟁 A급 전범자 14명의 위폐도 이곳으로 옮겨 이를 두고 야스쿠니 신사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아베는 정치에서 발을 내려놓으면서 이 신사를 참배함으로써 신사와 일본의 정치를 한 영역으로 묶어 외부에 각인시키려는 속셈을 노골화하고 있다. 이것은 민간 복리를 비는 신앙심을 정치에 이용하려는 교묘한 술수이다.

사실 일본 정치가들은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더 못된 짓을 한다. 우리나라 전국 곳곳의 명산에 신사를 세워 놓고 1935년부터 일본 천황을 위해 참배를 하라고 강요하였다.

신사 참배하여 품성을 도야의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도 신사참배를 억지로 시킨다. 1937년 중·일 전쟁이 터지자 소위 '황민화(皇民化)정책을 내세우면서 더 노골적으로 전 국민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한다.

1945년 해방 전까지 신궁(神宮) 2곳, 신사(神社) 77곳, 면 단위의 작은 신사가 1,062곳이나 세워졌다. 각급학교 등에는‘호안덴[奉安殿]을 세우고, 집집마다 ‘가미다나[神棚]라는 신단(神壇)을 만들어 놓고 참배하라고 칼을 코끝에 들이밀었다.

1945년 해방이 되었다.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는 조선총독부가 스스로 불을 질러 버렸다. 전국의 신사는 해방이 되자 분노한 한국인의 손에 불타거나 부서졌다. 3개월이나 버티던 부산의 용두산 정상에 있던 신사도 드디어 불길에 휩싸였다.

부산 앞바다의 바람은 신사를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기에 충분한 휘발유 역할을 하였다. 용두산 신사가 불타는 것을 보는 사람들은 조선 사람들의 억지 절까지 받아먹어 화력(火力)이 세다고 하면서 그동안 일본 순사들에게 받았던 학대를 불길 속으로 쓸어 넣었다.

50년이 지난 후, 이 신사는 당시 36세의 민영석이라는 기독교 청년에 불탔다는 것이 겨우 밝혀진다.

신라신사
바다를 등대처럼 바라보며 풍어를 기원하는 금비라신사
언덕에 있으나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금비라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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