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한국전망대에서 역관의 죽음을 애도하다
[기획연재] 한국전망대에서 역관의 죽음을 애도하다
  • 괴산타임즈
  • 승인 2020.09.11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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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는 본시 우리 땅이다' 작가, 이석우 시인의 우리 역사문화 답사기
눈물의 섬 대마도를 가다 37.
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부산항에서 한 시간만 푸른 바다의 파도를 헤치고 가면 대마도에 닿는다. 제주도의 절반에 달하는 이 섬은 49.5km의 거리를 두고, 마치 조선반도에 발을 들여놓기 위한 디딤돌처럼 앉아 있다. 이곳에서 일본 본토와는 132km나 되니까 두 배가 훨씬 넘는다.

한반도에서 흘러간 부유물들이 하루면 도착하는 이 섬에 오래전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웃 마을을 오가듯 건너가 살아왔다. 섬 이름이 대마도(對馬島)인 까닭을 중국 사서 위지 (魏志)는 ”마한(馬韓)과 마주한 땅이라 하여 대마도“ 라 적고 있다.

1750년대 제작된 ‘해동지도’에 ‘백두산은 머리고 대관령은 척추며, 영남의 대마도와 호남의 탐라를 양발로 삼는다.’(以白山爲頭 大嶺爲脊 嶺南之對馬 湖南之耽羅 爲兩趾)라고 하였다.

대마도 여행 시, 한국관광객이 제일 많이 찾는 곳이 한국전망대이다. 와니우라 해안 언덕 정상에 자리한 한국전망대는 1997년 5월에 세워진 것으로 한국의 한옥 전문가들이 동원되어 한국의 파고다 공원에 있는 팔각정을 모델로 만들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부산의 야경이 조망된다. 대마도에 살던 한국인들이 고향이 그리울 때 자주 찾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 옆에 ‘역관사순난지비’가 있어 찾는 이의 가슴을 숙연하게 한다.

조선 정부는 대마도에서 크고 작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100여 명씩 사절단을 파견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대마도 21대 도주 종의진의 사망에 이어 새 23대 도주 종의방이 취임하였다.

 에도 시대(江戸時代)에 쓰시마 후추 번(對馬府中藩)이 설치되자, 대마도 도주인 소(宗) 가문이 쇼군(將軍)으로부터 다이묘(大名)로 임명을 받았는데 종의진이 그 세 번째이다. 이때 조선은 이를 막지 못하였다.

대마도는 원래 하나의 섬이었으나 1672년 대마도 21대 도주 종의진 때 작은 배가 아소만과 대마도 동부를 왕래할 수 있도록 오후나고시(大船越)를 만들어 두 개의 섬으로 갈라놓았다.

1900년 일본 제국 해군이 군함을 신속하게 이동시키려고 이 만제키세토(万関瀬戸)라는 운하를 만든 것인데, 대마도 섬 북부를 가미시마(上島), 남부를 시모시마(下島)라 부르게 되었다.

일본 막부는 1696년 1월 종의진에게 竹島(죽도)는 조선영토이며, 1618년과 1661년에 미자(米子)의 어민(大谷과 村川)에게 '竹島渡海免許'(죽도도해면허) '松島渡海免許'(송도도해면허)를 내주었을 뿐이니 그 섬을 돌려준다고 말할 수는 없고 단지 일본 어민들이 그 섬에 건너가서 고기잡이하는 것을 금지해야 할 뿐이라고 명령한다.

이로써 1618년의 '竹島渡海免許'(죽도도해면허)와 1661년의 '松島渡海免許'(송도도해면허)는 자동적으로 취소되었다. 막부가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닌 것을 인정한 것이다.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 분쟁을 마무리한 종의진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1703년(숙종 29) 음력 2월 5일 아침 3척의 배가 부산항을 출발한다. 정사 한천석과 부사 박세양을 비롯한 108명의 역관 일행이 타고 있었다.

대마도 도주가 보내준 예인선은 푸른 바다의 풍랑을 헤치며 앞으로 나가고 사선이 뒤따른다. 그런데 갑자기 정오가 지나자 풍랑이 사나워지기 시작하였다. 배 3척이 모두 대마도 북쪽 와니우라 앞바다에서 암초에 부딪혀 좌초하고 말았다.

'와니'는 일본말로 악어의 뜻이다. 와니우라는 '악어 악(鰐)'에 '포구 포(浦)'를 합친 사용한 단어이다. 그 모습이 마치 악어 이빨 같다고 하여 '와나우라'라는 지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실제로 포구 앞쪽에 악어 이빨처럼 날카로운 암초들이 항상 배 밑바닥을 노리고 있던 것이다.

1991년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112개의 영석(靈石)을 쌓아 순난지비를 세웠으나 순난자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종가문서에서 그들의 이름이 들어 있는 묵서소책자(墨書小冊子)를 발견하여 300주기가 되는 2003년 3월 순난지비 옆에 그 명단을 적어 표석을 세웠다.

정사와 부사 그리고 상관 28명 중관 54명, 하관 24명과 대마도의 역관 4명이 타고 있어 인원이 112명이 된다. 애도의 물결은 곧 애국의 물결이다.

한국전망대 / 이곳에서 우리나라의 손전화를 사용할 수 있었는데 일본 측의 전파방해로 들리지 않는다. 가까운 곳에 한국이 있다는 인식을 깨뜨리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한다.
한국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와니우라 마을의 모습
朝鮮國 譯官使 殉難之碑(조선국 역관사 순난지비) / 한천석 일행의 축음을 추모하기 위해 한국에서 가져간 재료로 이 비석을 세웠다.
역관들이 대마도를 향해 항해하던 모습을 돌에 새겨 놓았다. 조선 후기에만 이들은 51회나 대마도를 다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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