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서면의 '도량을 갖추어라'
최서면의 '도량을 갖추어라'
  • 괴산타임즈
  • 승인 2020.06.18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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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신의 詩로 쓰는 컬쳐에세이
이승신 시인이 동경 메구로 강 6키로에 늘어진 밤 사쿠라 배경으로  -  2016  3  28  동경
이승신 시인이 동경 메구로 강 6키로에 늘어진 밤 사쿠라 배경으로 - 2016 3 28 동경

최서면 선생이 가셨다.

경기도 파주 조리읍 뇌조리 하늘 묘원의 가묘에 묻히신 것이다.

그간 거기에 가짜 묘가 있었고 마침내 선생이 묻힌 데에는 사연이 있다.

우여곡절 후 1965년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었고, 같은 해 일본대사로 가나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1909∼1997 가 부임하게 된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활동한 대사였는데 한 번은 박정희 대통령이 그에게 주한 특명대사이기보다는 '주일 특명한국대사'가 되어줄 수 없겠냐 며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일본 총리에게 전하는 친서를 주었다. 포항제철을 만드는데 기술협력을 요청한 내용이었다.

사토佐藤 총리는 물론, 당시 일본의 재계 총리로 알려진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신일철 회장도, 나사 한 개 만들 줄 모르는 나라에 무슨 제철소냐 며 반대하는 걸 설득하여, 마침내 포항제철이 생긴 데에는 가나야마金山 대사의 지대한 공이 있다.

귀국 후 외무성의 높은 지위를 사양하고, 일한친선에 헌신할 것을 그는 결심한다. 일본은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과 외교를 잘 하면 성공이라고 생각하겠지만, 4 강과 외교를 잘 해도 한국과의 관계를 잘하지 못하면 일본 외교는 실패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동경에서 한국연구원을 이끌어 온 최서면 원장은 그 안에 국제관계 연구소를 만들어, 가나야마를 소장으로 앉혔다. 하루는 최원장과 같이 방한하여 최원장의 어머니가 묻힌 파주 하늘 묘원을 참배하고는 '나도 여기 최원장 곁에 묻히고 싶다. 죽어서도 한국 땅에 묻혀 함께 일·한 관계 이야기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가나야마 대사의 가묘가 만들어졌고 1997년에 타계하자 동경에서 아들이 가져온 그의 유골을 거기에 묻은 것이다. 구상 시인이 쓴 비문에 '나는 죽어서도 일·한 친선을 돕고 지켜보겠다'는 그의 유언이 기록되어 있다.  한·일 국교 정상화 직후 반대에도 불구하고 3·1절 기념식에 그가 참석한 것은 지금까지 어느 일본 대사도 이은 적이 없다.

최서면 선생에게 그 가묘 이야길 들을 적마다 가슴이 뭉클했었다. 그런데 가나야마金山 대사의 한국사랑도 대단하나 거기엔 최서면 선생의 끄는 힘, 마력과 매력도 있을 것이다.

그 곁에 23년 가묘로 있던 자리에 이제 최서면 선생이 묻힌 것이다.

그는 1958년부터 30년 간 동경에서 한국연구원을 설립하고 독도와 한·일 관계 연구에 일생을 바쳐 온 근현대 역사학자다. 수많은 외교문서와 자료, 독도영유권을 입증하는 고지도를 발굴하고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되어 있던 북관대첩비 (임진왜란 때 함경도 의병의 전승을 기록한 전공비)를 돌려 받는데에 기여한 한·일관계의 권위자다. 아베 총리가 기시 노부스케 총리인 외할아버지처럼, 사토 에이사쿠 총리인 외삼촌할아버지처럼, 아베 신타로 일본 외상인 아버지처럼, 뉘우칠 줄 아는 그런 유산을 받아야 한다고 따끔하게 말해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속이 후련하게 만들어 준 분이다.

한·일 외교가의 막후로 활약하며 일본 정계 실력자들과 교류해 관계에 고비가 올 제마다 중재하며 소통을 강조했다. 그때마다 '비판은 하되 상대방 시각도 고려하는 도량을 갖추라'고 했다. 그런 도량을 그는 갖고 있었다.

내가 최선생을 안 건 오래 됬으나 자주 뵙게 된 건 2012년 부터였다.

일본에 큰 쓰나미가 나고 단숨에 250 수의 시를 지어 양국 신문들과 TV에 나게 되자 양국에서 시집을 내게 되었고 한승주 선생의 권유로 서울과 동경에서 출판기념회를 하게 되었다.  한·일관계가 안좋던 시기, 예리한 국제외교 안목의 소산일 것이다.

서울에서 한 후 동경이 고민이었다. 신각수 당시 대사가 도왔지만 그 의미를 진정 알만한 분들을 모으는 게 쉬운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최서면 선생이 떠올랐고, 광화문 집을 찾으니 늦은 시각에도 기자 몇이 앉아 있었다.  두 책도 아직 안보신 채 그 자리에서 동경으로 즉각 전화하는 행동력을 발휘했다.

그때문에 다음 날 그 분들도 동경 출판기념회에 모였고, 감격하여 눈시울을 적시며 기립 박수를 하고 줄을 서 악수를 했다. 시詩가 자신과 뭔 상관인가 하며 억지로 갔는데, 안갔으면 큰 손해 볼 뻔했다고 연락이 왔다며 최선생이 기뻐하셨다.

그렇게 그 분들이 서울에 올 제마다 함께 했고 매달 동경에서 '최서면을 둘러 싼 모임'을 가지는데 나도 네 번을 참석했다. 최서면 선생이 한·일 역사와 현황을 강연하는데 일본 정부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최서면 선생께는 배운 점이 많다. 교토 유학시에는 동경서 교토까지 비서들과 오시어 고서적 집과 임진왜란 때의 귀무덤인 이총耳塚을 둘러보았고,  2017년에는 천왕의 학습원 동기인 하시모토 아키라 선생이 그를 여러 해 인터뷰하여 낸 '한국연구의 귀재 최서면' 책의 동경 출간기념회에서 함께 인사말을 하기도 했다.

2 년 전 폐수술로 최서면 동경강연이 이젠 끝인가 보다 하여 그 모임의 멤버들이 서울에 뵈러들 왔고, 그러고도 여러 번 동경을 가시어 안심이 좀 되었는데 이번에 아주 가신 것이다. 

친한파 그들이 몹시 슬퍼하고 있다.

'생존하는 이 중, 김구 선생 목소리를 들은 이는 나 뿐일 게야' 하시던 선생님. 탁월한 기억력은 물론, 넘치는 유머 감각과 배려심, 넉넉한 품성의 선생님. ' 왜 교토인가' 나의 신간을 뵐 제마다 드리면 내 앞에서 서문을 다시 또 읽으며 '제법이야 제법이야~'  힘을 주시던 선생님.

집 앞 경복궁 마당의 '북관대첩비'를 보면 선생님 생각이 많이 날 것이다.

한·일 양국에 걸친 실로 파란만장한 고된 삶이었다.

봄꽃 속에서

어머니 생각에 봄꽃 속

눈물 지으시던 선생님

그 어머님과

일생의 나침반이던 백범 선생

나란히 누운 가나야마 대사 등

반기며

고단한 삶 내려 놓으십시요

땅에서 그 나라 보이진 않지만

거기서 다 내려다 보실 선생님

우리가 그 뜻을 이어 가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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