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진실을 밝히는 것은 역사를 안심시키는 것이다
[기획연재] 진실을 밝히는 것은 역사를 안심시키는 것이다
  • 괴산타임즈
  • 승인 2020.06.0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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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는 본시 우리 땅이다' 작가, 이석우 시인의 우리 역사문화 답사기
눈물의 섬 대마도를 가다 30.
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1589년 토요토미는 중 겐소(玄蘇)를 조선으로 보내어 통신사 파견을 요구하였다. 조선 정부가 거절하자 겐소는 궁궐을 바라보며 두 손 모아 간청한다. 조정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홍문관 허성이 “풍신수길은 본래 일개 필부로서 시의(時宜)를 틈타서 권력을 잡았으나, 일본 영주들이 거의 복종하지는 않으므로, 우리나라의 세력을 업고 일본 영주들을 제압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반드시 다른 뜻은 없을 것입니다.”라며 정세 탐지 차원에서 사신을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라 하니, 유성룡도 찬동하였다.

유성룡과 허성의 인품에 눌려 서인들은 겨자 먹고 우는 식으로 동의한다. 정사는 서인의 황윤길이 맡고, 부사는 동인의 김성일이 맡았으며 허성은 실무 책임자인 서장관이 되었다. 허성의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동인의 좌장(座長)이었으니 허성도 동인이다.

1590년 5월 비로소 바다를 건너가서, 토요토미를 만나보고, 1591년(선조 24) 봄에 돌아왔다. 도요토미는 조선 사신들 앞에 떡 한 접시와 막걸리를 내놓는 홀대에 이어, 어린 외아들을 업고 돌아다니는 기만술을 폈다. 포대기 속에 침략 야욕을 숨기려는 계략을 편 것이다. 그의 연기 효과가 조선 조정에서 그 실체를 드러낸다.

1591년 3월 통신사의 출장복명이 시작된 것이다. 서인 황윤길은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동인 김성일은“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을 동요되게 만드는데,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라며 두 사람은 선조 앞에서 다투었다. 이때 서장관 허성은“왜적들이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보장하기 어렵다.”라며 동인의 당론을 무시하고 서인 황윤길의 의견에 찬동한다. 선조의 말처럼 참으로 괴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요즘의“금태섭 의원의 사태”가 4백여 년 전에 벌어진 것이다. 자기소견을 굽히지 않는 한 선비가 우리의 역사를 안심시키고 백성을 행복하게 만든 것이다.

1592년(선조 25)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황윤길은 왜란 전에 죽고, 김성일은 임금에게 일본의 정세를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고 하여, 체포되어 압송 도중에, 유성룡의 변호로 석방되어 경상우도 관찰사 겸 순찰사를 역임하다 1593년 진주성에서 병사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집권세력은 잘못이 있어도 처벌에서 벗어날 수 있다.

1608년 2월 선조가 승하하자, 광해가 왕위를 이어받으면서 국장이 진행된다. 이때 수문장 정승서가 임해군의 집에서 각종 병기를 보았다고 고변한다. 옥사가 벌어졌다. 많은 사람이 죽고 임해군은 강화도로 귀양 가서 굶어 죽는다.

이때 옥사 고변자들이 공신으로 책봉되는데 이조판서였던 허성이 1등 녹훈을 받는다. 선조의 장인이기도 한 허성의 위세와 학문으로 옥사를 정당화하려는 자들이 공신 선 순위로 밀어 올린 것이다.

1610년(광해군 2) 허성은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의 추숭(追崇)을 강력하게 반대하다가 사대문 밖으로 쫓겨나 살다 65세에 죽는다.

그의 강직한 소신은 세월 따라 낙엽처럼 지지만 참을 아름답다. 그는 행동과 예의가 반듯한 사람이다.

학문이 육경(六經)의 원리를 뚫었으나 자신이 옳다고 판단되면 천만 사람이 반대하더라도 움직이지 않는다.

당시 문장가 허균은 배다른 동생이었고 시로 유명한 허난설헌(許蘭雪軒)은 여동생이었다.

허성은 문장과 더불어 실용(實用)학문에도 예리한 관찰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의「소나무를 옮겨 심는 글」을 보면, “소나무를 옮겨 심을 때 원래 서 있던 자리의 흙을 많이 파다가 먼저 그 흙으로 뿌리를 두껍게 묻은 다음에 다른 흙으로써 구덩이를 메운다.

처음 뿌리를 묻는 원래 흙에는 다른 흙이 섞여 들어가지 않게 해야 하며, 다지지 말아야 한다. 흙을 다지다가는 뿌리를 상하게 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흙으로 구덩이를 메울 때는 되도록 흙을 많이 퍼 넣지 말고, 얇게 편 다음에 꽁꽁 다지고 다시 흙을 퍼 넣어 펴고 다지는 식으로 메워 올라간다.

나무등걸의 묻혀 있던 자리까지만 흙을 채우고, 그 이상으로 흙이 올라가지 않도록 주의한다. 소나무의 드러난 뿌리는 묻지 않도록 한다. ”라고 하여 지금 원예를 전문가들이 황용하는 상식을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오나 노부나가의 몸종 신분으로 신임을 얻어 주인이 되고 일본을 통일하기에 이른다.

『간양록』에 따르면 노부나가가 다른 종들을 시키면 항상 비싼 값을 치르거나 사오지 못하는데, 도요토미는 매번 싼 값으로 좋은 물건을 사다 바쳤으므로 노부나가는 그것을 흡족해하며 신임하게 된다. 그러나 매번 자기 돈 절반을 보태 물건을 사온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대마도 도주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한 많은 다이묘가 조선으로 군사 내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도요토미는 출전을 강행한다.

이에야스는 풍토병 등을 둘러대며 전쟁에 불참하였다. 맞상대의 세력이 국내에 남아 무슨 일을 꾸밀지 모르니 도요토미는 직접 출병하지 못하고 부하들만 출병시키게 된 것이다.

도요토미는 조선의 사신이 돌아갈 때는‘반드시 군사를 일으킬 것’이라는 회답 서신을 보내도록 하였다. 일종의 선전포고다. 그에 따르면 갑자기 쳐들어가면 자는 사람의 목을 치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상대방이 준비한 후에 승부를 내야 한다는 장부다운 기계였다.

그는 체격이 왜소하며 추남인 데다가 6 손가락으로 문맹이며 별명은 원숭이였다. 천민 출신의 신분을 추스르기 위해 허풍스러운 가식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도요토미는 1598년 음력 8월 18일 후시미성에서 62세로 사망하였다. 그는 위암 독살 등의 소문과 함께 아미다 산에 매장되었으나 조선에 출병 중인 왜군에게 그의 죽음은 비밀이었다. 군의 사기 저하를 막으려 속셈이었다.

도요토미의 무덤은 임진왜란 발생 책임의 멍에를 지고 폭파되어 소멸하였다. 조선에게 임진왜란은 히데요시의 강요에 의한 전쟁이었음을 증명하는 일본인다운 가장 손쉬운 방법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의 아들 히데요리는 1615년 도쿠가와의 습격을 받아 어머니와 오사카성에서 자결하여 도요토미 가문의 2대를 정리하였다. 아베는 이를 제일 존경한다고 한다.

이즈하라에 있는 통신사 황윤길 현창비 (2011년 건립)
김성일 종가 전적 중 문충공 유묵=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있는 조선 선조 때의 문신·학자 김성일의 종손 가에 소장되어온 전적 일괄. 보물 제905호. 56종 261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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