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가미가제와 황망한 일본의 민족주의
[기획연재] 가미가제와 황망한 일본의 민족주의
  • 괴산타임즈
  • 승인 2020.03.31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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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는 본시 우리 땅이다' 작가, 이석우 시인의 우리 역사문화 답사기
눈물의 섬 대마도를 가다 25.
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1274년 10월 3일 합포 앞바다의 잔잔한 파도 위에 여몽연합군 900척의 전선이 닻을 펄럭이고 있었다. 10월 5일 드디어 여원연합군 전선이 대마도 사쓰우라에 상륙하였다. 고려병사들이 120cm 단궁을 몸에 붙이고 달려 나가면서 쏘아 붙이면, 화살이 140m를 날아가 일본 병사들을 여지없이 쓰러뜨리는 것이었다. 일본 병사들은 220cm나 되는 장궁으로 결사적으로 응사해 보지만 50m를 고작 날아올 뿐이다.  그들은 백사장으로 달려오다 쓰러져 무사답게 장렬한 최후를 맞는 것이었다. 살아남은 여자들은 몽고군에게 무참하게 유린당하였다.

10월 14일 오후 4시경 일기도(一岐島)에 연합군이 상륙하였다. 일본군사들은 대적할 수 없어 성으로 쫓겨 들어갔다. 날이 밟자 히츠메성은 밥 한 끼 지을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공성전에서 실패한 다이라노 카케타카는 자결하고 말았다. 이 의로운 죽음은 일본인들을 각성하게 만들었다. 일본 정부는 나중에 정4위 벼슬을 추증하였다.

잡힌 사람의 코와 귀를 베고 여인들을 강간하고 어린아이도 무참히 살해하였다. 여인이 도망가다 붙잡히면 손바닥에 구멍을 뚫어 뱃전에 매달았다. 산속으로 달아난 여인들은 동굴 속으로 몸을 숨겼다. 어린애가 울면“무쿠리(몽고) 고쿠리(고려)”도깨비가 온다며 울음을 억누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의치 못하면 어미로써 아이의 목을 눌러 영원히 소리를 잠재우는 것이었다. 일기섬 도처에는 어린 영혼들의 숨소리를 숨겼던‘가쿠레아나’라는 동굴들이 있다. 그리고 시장에는 그들이 슬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만들어 파는‘무쿠리 고쿠리’라는 인형들이 관광객을 기다린다.

여원연합군은 일본 본토인 규슈의 하카타만으로 북을 울리며 달려갔다. 규슈의 여러 지방 무사들이 달려 나왔다. 10월 20일 900척의 전선에서 쏟아져 나온 4만의 연합군이 상륙하였다. 대장 쇼니는 휘하의 무사들을 독려하며 분전하였으나 소용없었다. 화약포까지 동원하고 있는 연합군을 대적하기에는 전력이 턱도 없었다.

날이 저물었다. 일본병사들이 절반이나 사살되었다. 합동사령부에서 장성들의 작전회의가 시작되었다. 김방경 장군은 여세를 몰아 육지로 밀어붙이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몽고의 흔도와 홍다구는 "깊숙이 들어갈 수는 없다"고 하였다. 원군의 유복형 부원수가 화살을 맞은 것이 못내 불안한 눈치였다. 끝내 군사를 후퇴시켜 하카타항의 전함 속으로 밀어 넣기에 급급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그날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태풍이 몰아닥쳐 900 척의 간운데, 200 척이 나무 부스러기로 변해 바다를 덮고 있었다. 일본 군사들은 바닷가로 달려 나와 서로 얼싸안고 기뻐하였다. 하늘이 신풍(가미카제)을 보내와 일본을 도왔다며, 일본은 하늘에 근본이 있는 나라라며 날뛰었다.
합포로 후퇴하여 군사를 헤아려보니 1만 3천 5백 명의 병사가 바닷속에서 돌아오지 못하였다. 김방경 장군의 주장을 따랐다면 역사상 일본의 신풍(가미가제)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2차 여원연합군이 출정하였다. 1281년 5월 21일 연합군이 대마도를 공격하였으나 저항완강하여, 5월 26일 일기도로 상륙하였다. 6월 6일 여원군은 하카타만으로 진격하였다가 다시 일기도로 물러났다. 7월 2일이 되어서야 강남군이 하라도에서 접선하자고 연락해왔다. 일부러 어정거리는 것이 확실하였다. 7월 27일 일본함대와 접전이 벌어졌다. 이 공방전은 막상막하를 이루고 있었다. 고려의 김방경 장군은 속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농사철을 바다에서 다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7월 30일 다카시마 근해에 강풍이 불기 시작하였다. 2천 척의 배들이 서로를 부딪쳐 침몰시키고 있었다. 원나라 지휘관들은 이 아수라장에서 도망쳐 버렸다. 공식적으로 고려군은 26,989명 중 19,397명만 생환하였다. 살아서 산속으로 들어간 10만 병사는 모두 붙들렸다. 남송인 2~3만 명만 남기고 모두 참수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20년간 노예로 살다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신풍(가미가제)이 일본을 위해 불어준 것이라고 그들을 믿게 만들었다. 이후 그들은 해적질을 해도 양심에 가책을 가지지 않고 전쟁터에서 산자나 죽은 자의 코와 귀를 전리품으로 베어 나르는 짓을 하면서도 부끄러움을 잊게 하였다. 그 원인을 몽고군이 제공한 것이다.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는 1차 여원연합군의 일본 원정을 일본군을 무사 다케자키 스에나가가 제작한 것이다. 활을 맞고 몽고 병사가 도망치는 가운데, 검은 군화를 신은 고려병사가 나타나 말탄 일본 무사를 척살하고 있다. 고려병사는 도깨비형상의 두상으로 무섭게 그려 놓았다.
대마도의 고모타하마신사 옆에 있는“원구(元寇)700년 평화지비” : 700년 전 여원연합군의 침략을 기념하여 세운 비, 1274년에 있었던 1차 침공을 분에이의 역(文永の役), 1281년 2차 침공을 코안의 역(弘安の役)이라고 하며 이 때 연합군을 ‘원구(元寇)’로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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