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섬 대마도를 가다 20.
영산강 유역은 마한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이다. 마한은 당시의 부족 중에서 가장 강력했을 뿐 아니라 문화도 월등히 발달하여 그 세력의 파급력은 위력적이었다. 일본에 철기문화를 전파하기도 한다.
마한의 강대한 세력을 잘 입증해 주는 것은 이곳의 고분군이다. 사적 제77호 고분으로 지정된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와 대안리 고분군과 그리고 사적 제78호로 지정된 덕산리 고분군이 바로 그것이다.
이 중에서 신촌리 9호분에서는 국보 제295호인 금동관과 환두대도, 금동신발 등이 출토되어 지역의 세력가가 어떤 왕이었을까? 하는 주목을 받고 있다.
반남면 일대에 흩어져 있는 고분들은 대부분 원형이거나 윗부분이 잘린 피라미드 형태로 대개 땅 위에 거대한 봉분을 쌓아 올린 후 그 꼭대기에서 2~3m 내려간 곳에 옹관(甕棺, 독널)을 묻고 있다.
이때 사용된 옹관은 1m 70cm가량 되고 입의 지름도 1m 넘는 대형 옹관 하나를 사용한, 경우도 있지만, 주로 두 개의 옹관을 이은 것들이 많다. 삼국 시대의 고분들 가운데 옹관묘를 쓰면서 왕릉처럼 거대한 봉분을 만든 곳은 나주 반남면과 영암 시종면 고분 등이다.
그런데 강릉의 안인리 유적은 동해에 접한 군선강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 유적은 B.C 1세기~A.D 2세기의 철기시대 집단취락지로 보이는 마을 유적으로 난방 주거지와 파괴된 고분 4기가 조사되었다.
이는 동해안 지방의 선사문화와 그 전파 경로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데, 특히 소형 옹관묘의 경우 영산간 유역의 소형 옹관묘처럼 1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들의 전파 경로와 일본으로 흘러 들어간 경위는 필연적으로 밝혀내야 할 연구 과제가 될 것이다.
이 옹관묘세력은 중국에서 발현된다. 이 세력을 영산강 유역의 확실한 통치권을 가지고 있던 마한이 일찍 받아들인 것이다. 이시기의 왜는 마한을 침략할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따라서 마한 내에서 왜의 세력이 성장하여 대마도를 거쳐 일본 열도로 진출했을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마한의 옹관묘는 철기시대 초기인 기원전 1세기 경부터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소형의 옹관묘로 일부 지역에서만 한정되어 나타나고 있다. 영산강 유역에서 대형 옹관묘가 나타나는 것은 기원후 3세기 후반 경이다.
일본 요시노가리 유적은 일본 야요이 시대(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 무렵) 유물들이 다량 출토된 일본 최대 마을 유적이다. 3000기가 넘는 옹관묘 무덤이다. 그러나 옹관묘의 세력이 중국에서 흘러내려 왔다고 보았을 때 연대 종정은 불가피해 보인다.
백제 지배층의 무덤이 굴식돌방무덤임을 감안하면, 나주 영산강유역에는 백제와 전혀 관련이 없는 금동관의 주인공과 같은 강력한 정치력을 지닌 세력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마한은 서기 369년(백제 근초고왕 24년)에 백제에 복속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영산강 유역에서 만들어지던 독특한 무덤 양식인 옹관묘가 돌방무덤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마도의 무덤양식은 이 시기의 백제 양식으로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