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런 괴산의 역사와 문화를 알고 찾고 가꿉시다
김근수(중원대학교 향토문화연구소장, 괴산향토사연구회장)
이어서 ☞ 참여 군중 규모나 격렬함에 있어서도 그 맥을 잇는 항일독립항쟁이었다.
독립운동가 중 금산군수를 역임한 홍범식(洪範植) {1871(고종 8)∼1910}과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당시 우리나라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인 권동진(權東鎭) {1861(철종 12)∼1947}이 대표적 인물이다.
홍범식(洪範植) 은 괴산면 인산리 출신으로 1871년 7월 23일에 출생하였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방(聖訪), 호는 일완(一玩)이다. 소설 '임꺽정'을 지은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홍승목(洪承穆)의 아들로 태어났다.
명문가의 자손으로 부친 홍승목은 1875년 별시 문과 급제 후 이조참의, 병조참판, 궁내부 특진관 등을 역임하였다.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배우는 등 명문 양반가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1907년에는 전라북도 태인 군수, 1909년에는 금산군수로 부임하여 지방행정에 힘썼다. 군수 역임 중 일제 침략에 항거하여 봉기한 의병들의 보호에 힘써 일본군의 체포망을 피하게 하였고, 일본군을 설득하여 백성에게 피해가 가는 일이 없도록 힘썼다.
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전하며, 감동한 군민들이 세운 마을의 송덕비가 38개에 이르렀다 한다.
1909년에는 금산군수로 부임한 이듬해인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강제 병합하는 한일합병조약의 조인 소식을 듣고는, “내가 이미 사방 백리의 땅을 지키는 몸이면서도 힘이 없어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니 속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탄식하였다.
1910년 8월 29일 드디어 한일합병조약이 공포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객사 뒤뜰 소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나라가 망했으니 나는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하겠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권동진(權東鎭)은 소수면 아성리(阿城里)353-1번지에서 1861년 12월 15일 태어났다. 호는 애당(愛堂)․우당(憂堂), 도호(道號)는 실암(實菴)이다. 아버지 권재형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서 6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괴산에서 서울로 이주한 후 1880년경 사관학교가 개설되자 제1기생으로 입학했다.
1885년에는 경상남도 함안군수로 임명, 1년 정도 근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