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런 괴산의 역사와 문화를 알고 찾고 가꿉시다
김근수(중원대학교 향토문화연구소장, 괴산향토사연구회장)
이어서 ☞ 이신의(李愼儀)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경즉(景則)이고 호는 석탄(石灘)이며 본관은 전의로서 참의 이원손(李元孫)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군 3백 명을 거느리고 적과 싸워 공을 세우고 사간원 직장이 되었다. 1600년부터 약 3년간 괴산군수를 거쳐 광주목사(廣州牧使)·남원부사·홍주목사·해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차도해(遮道解)는 이신의 군수가 임기를 마치고 선조36년(1603)떠나려 할 때 괴산 읍의 노인들이 길을 막고 군수를떠나지 못하게 했는데 이신의 군수의 입장에서는 꼭 떠나야 되겠다는 이유가 있어서 그것을 설명하는 글로 유명하다. 괴산의 화암서원(花岩書院)에 제향되고 있다.
이인서(李麟瑞)는 호는 청계당(廳溪堂)이고 본관은 연안(延安)으로 이석형(李石亨)의 손자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자애로우며 효성이 지극하더니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여러 곳에서 왜적과 싸워 많은 공훈을 세웠다. 관직은 의흥(義興) 현감을 역임하였으며 광해군 때 정치가 문란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말년을 지냈다. 묘소는 괴산군 감물면 이담리 문장동에 있다.
전유형(全有亨)은 자는 숙가(叔嘉)이고 호는 학송(鶴松)이며 본관은 평강(平康)으로 전경(全絅)의 아들이다. 괴산의 유생으로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1594년에 청안 현감이 되었다.
경권중(慶權重)은 소수면 몽촌리에서 태어난 인물로 1907년 향리에서 의병 100여 명을 모집하여 전남 곡성․구례 등지로 전전하면서 병력을 강화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으나 패배한 바 있고, 후에 1919년 4월에는 독립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어 청주형무소에 복역 중 순국하였다.
1907년 12월 28일 경기재판소 판결자료 등에서 장경춘(張景春), 이용운(李龍云), 최경선(崔敬先), 김경문(金敬文), 정운기(鄭雲淇) 등 5인의 의병활동 및 의병 봉기 시도가 확인되는데, 이를 통해 일부나마 당시 괴산지역의 의병 활동 내용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한편 괴산에는 의병활동과 관련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괴산 갈읍의 의병산성, 이강년의 칠성전투, 한봉수 의병장의 괴산 모래재 의병전적 유적비, 성남 정운기 선생 공적비, 애국지사 의병장 권경중의 묘비 등이 있다.
3․1운동은 괴산에서는 3월 19일 괴산읍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는데, 이는 충청북도 내 최초의 만세운동이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경술국치로 순국한 홍범식의 아들 홍명희가 만세시위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홍명희는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여했다가 전날의 의병장 한봉수, 손병희를 만나 고향으로 돌아오는 즉시 동지들을 규합하고 경고문과 격문을 배포하여 괴산지역 첫 봉기를 이끌어냈다.
3월 19일 괴산읍에서 600여 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경찰서를 습격하고 감금되어 있던 주민들을 탈출시키려 했으며 이 때문에 주모자 7명이 검거되었다. 괴산읍에서는 3월 19일에 이어 3월 24일, 3월 29일, 4월 1일 모두 4차례에 걸쳐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괴산읍내의 시위를 비롯하여 괴산군내 다른 지역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3월 30일에는 청안면에서 3천명, 4월 1일에는 청천면에서 3천명, 4월 2일에는 장연면에서 400명, 4월 3일에는 소수면과 칠성면에서 340여 명, 4월 10일에는 광덕리에서 300여 명이 시위에 참가하는 등 읍내 못지않은 대규모 시위가 각 면에서 있었다. 특히 청안면에서 3천명 이상이 참가한 사실이 일본 측 기록에서 확인되며 당시 출동한 일본군의 발포로 6명의 주민들이 희생당할 정도로 격렬하게 저항했다.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괴산에서는 1919년 3월 15일 이후 4월 중순까지 58회 이상의 시위가 있었고 이로 인해 검거된 주민들만 268명에 이르렀다. 6명이 현장에서 살해당했으며, 이후 4명 이상이 부상 또는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괴산의 3․1운동은 동학농민혁명의 반외세 봉기와 조선 말 항일의병운동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