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수선사의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
[기획연재] 수선사의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
  • 괴산타임즈
  • 승인 2019.10.2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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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는 본시 우리 땅이다' 작가, 이석우 시인의 우리 역사문화 답사기
눈물의 섬 대마도를 가다 16.
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비통함을 참지 못해 조병세, 민영환, 홍만식 세 사람이 자결한다.

이 소식을 접한 매천 황현은, 끓어오르는 사모의 정을 형상화한 오애시(五哀詩)를 짓는다.

매천은 이 시에 붙여 말하기를 “을사늑약으로 조병세ㆍ민영환ㆍ홍만식 3공(三公)이 죽었다. 소식을 듣고 나는 감격적으로 사모하여 두보의 팔애시(八哀詩)를 모방하여 시를 짓는다. 최면암에 대해 그냥 언급한 것은 그러기를 바라는 것이고, 영재 이건창을 언급한 것은 오늘날 인물이 아주 적기에 추억해 본 것이다. ”라고 하였다.

방금 자결한 고관 세 분 이외에 이미 죽은 이건창과 아직 죽지 않은 최익현을 넣어 다섯 사람을 맞춰 ‘오애시’를 쓴 것이다.

매천은 면암을 향해 “원컨대 그대께서는 어서 자결하시어 저 같은 사람의 의혹을 조금이라도 풀어주소서(願公早自愛 少解小子惑)” 라며 어서 자결해 달라고 애소(哀訴)하는 시를 쓴 것이다.

연세도 훨씬 많고, 세상의 이름 높이도 자기보다 서너 배가 넘는 대선배에게 빨리 자결하여 후배들의 의심을 풀어달라고 하니, 이런 기막힌 시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 시에는 ‘국가에 대한 충정으로 면암은 곧 죽을 것’이라는 예언과 사모와 존경심을 함께 담고 있다고 할 것이다.

매천의 예언은 틀리지 않았다. 면암 최익현은 을사늑약 체결 후, 고향 정산(청양)으로 돌아가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일본인들이 병력을 파견하여 지키고 있어 움직일 수 없었다.

이에 최익현은 낮에는 안채에 병을 칭하고 누워 있다가 감시가 조금 허술해진 틈을 타서 전북 태인으로 임병찬을 찾아 만나니, 1906년 2월의 일이었다.

6월 4일 문인 수십 명을 데리고 무성서원에 도착한 최익현은 연단에 올라 눈물을 흘리며 사생을 맹세한다. “왜적이 국권을 빼앗고, 적신이 죄악을 빚어냈다. 구신(舊臣)인 나는 이를 차마 그대로 둘 수 없어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이제 대의를 만천하에 펴고자 한다. 승패는 예측할 수 없으나 우리 모두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죽음을 무릅쓴다면 반드시 하늘이 도울 것이다.”

80명 문인 제자들이 흔연히 사생을 맹약하고 대오를 편성하여 태인으로 행군하여 진입하니, 군수 손병호는 줄행랑을 놓는다.

오후에는 정읍군수 송종면의 항복을 받아들인 후, 내장사로 들어간다. 이때 흥덕의 선비들이 포군 30여 명을 거느리고 합류하였다.

다음 날 구암사(龜岩寺)로 들어가 하루 묵고, 새벽에 산안개를 헤치고 순창으로 들어가 군수 이건용이 의병들을 순순히 받아드렸다. 전력이 제법 강화되었다.

의병이 8백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6월 11일 광주 관찰사 이도재가 의병을 해산하라는 고종의 칙서를 보내왔다. 1906년 6월 중순 의병들이 태인으로 들어서니 군수 손병호는 도망쳐 버린다.

의병의 세력이 눈덩이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런데 대한제국의 지방군인 진위대가 의병들의 앞을 가로막고 나선 것이다. 아 이 일을 어쩌란 말인가. 일본이 아닌 동족과 어찌 싸움을 할 수 있겠는가! 의병들은 뜻을 거두고, 총을 거두고 오라를 받게 되는 것이다.

대마도롤 압송된 면암은 매천의 예언대로 대마도 감옥에서 단식하다 병을 얻어 운명하고 말았다.

일본 측이 면암에게 단발까지 강요하자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단식투쟁한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고종 황제의 만류로 단식은 중지되었으나 망국의 통한과 감옥생활의 고통은 선생의 몸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1907년 1월 1일 대마도의 감방 안에서 망국 한이 한 송이의 애절한 순국의 꽃으로 피어난다.

수선사에서 장례를 마치고 1월 4일 유해는 부산으로 이송되었다. 74세의 의병장 최익현의 죽음을 함께하려는 백성들의 슬픔이 노도와 같이 밀려들어 거리가 넘쳐 흘렸다.

논산근 노성면 국도변에 선생을 모시니 이곳에서도 참배객이 또한 인산인해였다. 일제는 같은 해에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산 24-1번지로 옮겼다. 현재의 묘소 옆에는 당시 매입하여 재실로 사용 중인 전통가옥 3채가 “ㄷ" 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매천은 면암의 장례식에서 제문을 지어 죽음을 슬퍼하고, 만시(挽詩)를 지어 그의 일생을 추앙하였다. 그리고 매천 황현 망국의 소식에 귀 막지 못하고, 면암의 뒤를 따라 자결하여 대선배 영혼의 품으로 돌아간다.

일제 강점기에 어느 일본인은 “만일 최익현과 같은 사람이 100명만 있었다면 조선은 충분히 독립하였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의 순국비가 대마도 수선사에 서 있다.

백제의 비구니 법묘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슈젠지(修善寺 수선사)에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가 있다.
백제의 비구니 법묘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슈젠지(修善寺 수선사)에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가 있다.
지조봉 축제는 매년 7월 24일 이즈하라 시내에서 열린다.  유카타를 차려입고 어린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것을 축원한다. 이 때 집안의 안전과 사고 방지, 평화를 기원하는 신앙의 상징인 지장보살상에게 새 단장을 한다.
지조봉 축제는 매년 7월 24일 이즈하라 시내에서 열린다. 유카타를 차려입고 어린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것을 축원한다. 이 때 집안의 안전과 사고 방지, 평화를 기원하는 신앙의 상징인 지장보살상에게 새 단장을 한다.
친일파 남작 김학진이 쓴 현판 ‘수선’이다. 1906년 홍문관 태학사에 임명되었으며 1910년 한일병합 때 남작 작위를 받았다. 이것은 아들 김덕한에게 습작 되었다.
친일파 남작 김학진이 쓴 현판 ‘수선’이다. 1906년 홍문관 태학사에 임명되었으며 1910년 한일병합 때 남작 작위를 받았다. 이것은 아들 김덕한에게 습작 되었다.
선생의 넋을 기리고자 이곳에 1986년 순국비가 세워졌다.
선생의 넋을 기리고자 이곳에 1986년 순국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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