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충절(忠節)의정신(精神) 2
[연재] 충절(忠節)의정신(精神) 2
  • 괴산타임즈
  • 승인 2019.10.19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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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인(槐山人)의 정신(精神) ⑪
자랑스런 괴산의 역사와 문화를 알고 찾고 가꿉시다
김근수(중원대학교 향토문화연구소장, 괴산향토사연구회장)
김근수 연구소장.
김근수 연구소장.

이어서 ☞ 이광악은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자는 진지(鎭之)이며 아버지는 군수 호약(好約)이다. 1584년(선조 17)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1592년 곤양군수가 되었다.

그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사들을 독려하여 방비에 힘썼다.

그해 10월 영남지방의 요지인 진주성이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고립되자 거창에 있던 그는 초유사(招諭使) 김성일의 명령을 받고 좌익장이 되어 수병(手兵)을 이끌고 진주성에 들어가 진주목사 김시민을 도와 싸웠다.

전투 도중 김시민이 부상을 당하자, 그를 대신하여 병사들을 지휘한 끝에 일본군을 물리치고 진주성을 지키는 데 성공하였다.

1594년 가을에는 의병장 곽재우의 부장이 되어 해로로 동래 방면에 출격했으나 풍우가 심한데다 일본군이 성에서 나오지 않아 그대로 돌아왔다.

1598년 전라도병마절도사로서 명나라 군과 합세하여 금산․함양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그 뒤 황해․전라 병사를 거쳐 훈련도정(訓練都正)에 이르렀다.

1604년 선무공신 3등으로 광평군(廣平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김시약은 무신으로서 본관은 안동이고 아버지는 지평 김충갑(金忠甲)이며, 형은 진주목사 김시민이다. 1596년(선조 29) 괴산 선봉장으로 창의하여 모병한 군사를 거느리고 왜적을 격파하였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관찰사의 천거로 별장에 발탁되었다. 이듬해 정유재란 때에는 통영군관(統營軍官)으로 관군과 의병을 통솔하여 창원․옥포 등지에서 왜군 24명을 죽이는 군공을 세웠다.

난이 끝난 뒤 훈련원첨정으로 승진되었으며, 1605년 선무공신 2등에 이름을 올렸다. 뒤에 창성부(昌城府) 첨절제사로 나갔다가 1627년 정묘호란을 당하여 성이 함락되자 그의 아들과 함께 포로가 되어 순절하였다.

1683년(숙종 9) 국가에서 향리에 정문을 세우게 하고 병조참판을 추증하였다.

유근(柳根)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회부(晦夫)이며 호는 서경(西坰)이다. 황정욱(黃廷彧)의 문인으로 1572년(선조 5) 별시 문과에 장원하고, 1574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87년 이조정랑으로서 문신 정시(文臣庭試)에 다시 장원하였다. 이 해 일본의 중 겐소[玄蘇]가 사신으로 오자, 문장이 뛰어났으므로 선위사(宣慰使)에 특임되어 그를 맞이해 대접하였다.

1591년 좌승지로서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정철(鄭澈)이 화를 당할 때 일파로 몰려 탄핵을 받았으나, 문재를 아끼는 선조의 두둔으로 화를 면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임금을 호종했으며, 예조참의ㆍ좌승지를 거쳐 예조참판에 특진되었다.

1593년 도승지로 경성안무사(京城安撫使)가 되어 민심을 수습, 이어 한성부판윤에 올라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리고 1597년 운향검찰사(運餉檢察使)로 명나라에서 들어오는 군량미의 수송을 담당하였다. 이 밖에도 임진왜란으로 인한 명나라와의 관계에서 많은 일을 하였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 강화에 왕을 호종하던 중 통진에서 죽었다.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녹훈되고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배향되고 소수면 몽촌리 문정사에서 제향하고 있다.

김순경(金舜卿)은 본관이 상산(商山)으로 현감 김요경(金堯卿)의 아우로 관직은 현감에 이르렀다. 1588년(선조 21)에 알성 식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마침 연풍 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왜적을 괴강에서 무찔러 선무훈에 녹선되었다.

연충수(延忠秀)는 자는 성백(誠伯)이고 본관은 곡산(谷山)으로 연사종(延嗣宗)의 후손이다.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청안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워 향리를 지켰으며 왜적이 물러간 후 도보로 영유(永柔) 행재소에 이르니 이때 공의 나이 30여 세로 선조가 인견하고 가상히 여겨 예빈시 참봉에 임명하였고, 내섬시 주부를 거쳐 중림도(重林道) 찰방,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증평군 도안면 송정리에 있다.

신경행(辛景行)은 청안 문방리에서 태어난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서 자는 백도(伯道), 호는 조은(釣隱)이며 본관은 영산(靈山)이다.

1573년(선조 6)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7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을 거쳐 병조좌랑이 되었는데, 이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호서지방에서 크게 활약하고 뒤에 한산(韓山) 군수가 되었다.

이원배(李元培; 1551~1594)는 본관이 성주(星州)로 기묘명현 이문건(李文楗)의 손자이며 관직이 첨정에 이르렀다.

조부 이문건의 유훈을 받들어 학업에만 힘썼는데 임진왜란을 당하여 군수 윤우(尹佑), 급제 우정침(禹廷琛) 등과 함께 창의하여 왜적과 싸워 잠시도 태만하지 않고 훌륭한 전략계획을 세우는데 공이 많았다.

우정침은 자는 계헌(季獻)이고 호는 사담(沙潭)이며 본관은 단양으로 양호당(養浩堂) 현보(玄寶)의 6세손이다.

1589년(선조 22)에 생원이 되고, 1591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종묘서(宗廟署) 영(令), 성균관 전적을 거쳐 내자시 판관에 이르렀다.

영춘·부여·남포·해미 등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으며 청렴으로 선정하여 청백리에 들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복·윤우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조복이 전사하자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용감히 싸워 북상하는 왜적의 주력부대를 저지하였다.

그로 인하여 예빈시 직장에 제수되었고 만년에는 퇴휴하여 여생을 후학의 교도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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