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충절(忠節)의정신(精神)
[연재] 충절(忠節)의정신(精神)
  • 괴산타임즈
  • 승인 2019.10.05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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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인(槐山人)의 정신(精神) ⑩
자랑스런 괴산의 역사와 문화를 알고 찾고 가꿉시다
김근수(중원대학교 향토문화연구소장, 괴산향토사연구회장)
김근수 연구소장.
김근수 연구소장.

이어서 ☞ 괴산지역은 국란(國亂)시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충열과 호국의 중심지 역할을 하여왔던 곳이다.

이는 교통의 중심으로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이럴 때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기위한 저항정신이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과 항일운동 등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 곳으로 개략하면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때 관직에 있으면서 공을 세운 괴산 지역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진주성 싸움에서 공을 세운 김시민(金時敏)․이광악(李光岳)․김시약(金時若) 등이 있으며, 이밖에 많은 의병과 독립운동가 들이 활약하여 국난을 극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먼저 김시민은 임진왜란 당시 3대첩 중 하나인 진주싸움을 승리로 이끈 장군으로서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면오(勉吾)이며 아버지는 지평 충갑(忠甲)이다.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軍器寺)에 들어간 후, 1583년 귀화한 여진인 니탕개(尼湯介)가 회령 지방에서 난을 일으키자 정언신(鄭彦信)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1591년 진주판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목사 이경(李璥)이 병사하자 그 직을 대리하면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를 편성하였다.

이때 일본군이 사천(泗川)에 집결하여 진주로 향하려 하자, 곤양군수 이광악, 의병장 이달(李達)․곽재우 등과 합세하여 적을 격파하고 고성․창원 등을 회복하였다.

이어 의병장 김면과 함께 거창 사랑암(沙郞巖)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 뒤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이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9월에는 진해에서 적을 물리치고 적장을 사로잡아 행재소로 보냈다.

이해 10월 적 2만여 명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성 안의 노약자와 부녀자까지 남장을 하게 하여 군사의 위용을 보이게 하는 등, 불과 3,800여 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적을 물리쳤으나 이 싸움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고 며칠 뒤 사망하였다.

이러한 전공으로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되고, 그 뒤 영의정에 추증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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