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한류의 원조! 조선 통신사 대마도로 향하다
[기획연재] 한류의 원조! 조선 통신사 대마도로 향하다
  • 괴산타임즈
  • 승인 2019.04.07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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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는 본시 우리 땅이다' 작가, 이석우 시인의 우리 역사문화 답사기
눈물의 섬 대마도를 가다 ①.
이석우 시인

태종은 1419년 6월 9일 왜구가 들끓고 있는 대마도 토벌에 앞서 “대마도는 본시 우리땅(對馬島本是我國之地)” 라는 대화문을 발표한다.

대마시는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무궁화 꽃을 심고 점심때가 되면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 꽃…”하는 노래를 흘려보내고 한국의 관광객이 이즈하라항에 도착하면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하며 고향의 향수가 듬뿍 묻은 동요를 들려주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마시의 한국 역사지우기 일환으로 멈추어 버렸다.

왜의 천지왕(天智王)은 ‘해돋이와 가까운 곳’이라는 의미의 일본(日本)으로 국호를 고친다. 660년의 일이다. 그해 백제는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여 멸망하고 말았다. 천지왕은 백제 의자왕의 누이동생이었던 제명여제의 아들이다.

일본 속에는 백제의 정신이 망국의 한과 더불어 향기처럼 배어 있다. 지금도 일본의 천황가는 백제가 그들의 고향임을 인정하고 있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대마도에 31개의 포대를 설치하여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괴멸시킨다. 이후 일본은 대마도를 군사요충지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지금 대마도에는 자위대의 미사일 기지가 설치되어 있다. 일본은 본국의 관광객이 한국 문화로 가득한 대마도로 발길을 돌리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다. 대마도에는 대학교도 없고 중요한 산업 연구소도 없으며 교회까지도 없다. 

해방 전에는 대마도에서 발생한 환자들은 부산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그 시절 대마도 사람들은 부산의 한 구로 지정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푸념을 입에 달았다고 한다. 

대마도는 도주의 힘이 약해지면 왜구들이 더욱 창궐하였다. 조선은 대마도 왜구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이종무의 대마도 징벌 후, 도둑질에 능한 왜구들이 숨어 있는 대마도와는 교역하지 못하게 고립화 정책을 썼다.

굶어 죽게 생긴 대마도주는 세종 2년(1420) 윤정월 10일 사람을 보내온다. "대마도는 조선을 주군(州郡)으로 하며, 그 주명(州名)을 지정받고자 합니다. 동시에 조선 조정에서 주군인(州郡印)을 내려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대마도를 다시 경상도에 예속시키고, 관인(官印)을 보내주었다. 세종 25년에는 계해조약을 맺어 대마도주에게 1년에 50척의 세견선과 200석의 세사미를 보내주었다. 이후 왜구의 노략질이 뜸해졌다.

대마도는 늘 한반도에 경제적 도움을 달라고 애걸복걸하면서도 왜구와 일본 정부의 칼날을 피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대마도는 곡식과 칼날에 의한 양속 관계에 놓였던 것이다. 한국인 관광객이 그들을 먹여 살리고 있으므로 지금도 현실적으로 그 양속 관계는 지속되고 있다할 것이다.

8월 첫째 토요일과 일요일에 걸쳐 조선통신사 행렬을 축제로 승화시킨 ‘아리랑 마쯔리(祭)’리가 성대하게 열렸다. 이 축제는 일본 5대 축제 중 하나이다. 

관광객 유치 차원이긴 하겠으나 한반도 도래인들의 무의식적인 고향에 대한 동경을 어찌 딸 잘라낼 수 있을 것인가. 이는 "무릇 대마도는 옛날에는 신라국과 같은 곳이었다.

사람의 모습도 그곳에서 나는 토산물도 있는 것은 모두 신라와 다름이 없다.”라고 한 대마도인의 저술『진대(塵袋) 2권』을 통해 그 답을 음미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선통신사는 조선과 일본 양국에 250년간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뿐 아니라 선진 문물을 전달하는 수단이 되었던 것입니다.

500 명에 이르는 이 사절단은 국왕의 외교문서를 지닌 채 인삼, 호피, 모시, 삼베, 붓, 먹, 은장도, 청심원, 각종 시문과 서적 등을 선물로 가지고 가서, 일본인들에게 당인의 춤(唐人誦), 마상재 등의 예술제를 제공하였다. 이것이 바로 한류의 원조인 셈이다.

당인 춤은 당나라풍의 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 볼 때 한반도의 대륙춤 개념이다. 그리고 마상재는 말 타는 기술을 말한다.

통신사가 나타나면 글이나 글씨를 받으려고 군중이 몰려들고, 특히 마상재(馬上才)의 곡예는 관백이 직접 관람하였다.

당시 마상재와 통신사행렬도 자개문향을 새긴 도장주머니는 일본 귀족사회의 유행품이 되었다. 6개월에서 1년 정도가 걸리는 조선통신사를 일본은 막대한 예산을 들이며 국빈으로 대접하였다.

아리랑 마쯔리는 부산과 대마시 합동으로 열린다. 조선통신사 일행을 영접하던 의식을 축제로 승화시킨 것이다. 아리랑 마쯔리는 한류의 재연이다.

대마도의 미사일 기지 밤에는 정면으로 부산의 야경이 펼쳐져 보인다.
대마도를 통신사의 섬으로 부르기도 한다. 통신사 선두에서는 청도 기수가 “길을 비켜라”라고 소리치며 길을 안내한다. 그리고 펄럭이는 국서형명기를 국서를 실은 가마가 뒤따른다.
국서형명기를 국서를 실은 가마가 뒤따르고 그 뒤를 통신사의 가장 우두머리인 정사가 뒤따른다.
조선통신사는 2017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제되었다. 조선통신사 이야기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 의지를 탐지할 목적으로 파견된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이야기일 것이다. 1591년 음력 1월 28일 일본 교토에서 귀환한 통신사는 조정에 상반된 보고를 한다. 서인이었던 정사 황윤길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올 것이다.”라고 주장을 하였고, 동인이었던 부사 김성일은 “침략의 징조를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동인이었던, 서장관 허성은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올 것이다.”라며 같은 당 김성일의 의견을 따르지 않는 올곧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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